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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선산은 ‘인재의 고향’ 이전에 신농업 기술의 메카였다

입력
2019.06.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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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경제 수준과 조밀한 인구 밀도, 꾸준한 인재 배출로 60년간 최선진 문화지대로 기능

길재의 초상. 금오산 채미정 경모각에 있다.
길재의 초상. 금오산 채미정 경모각에 있다.

1390년(창왕 2) 봄 수도 개경에서 문하성(門下省) 주서(注書)로 재직 중이던 길재(吉再; 1353~1419)가 고향에 내려와 칩거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392년 7월 새 왕조가 들어섰다. ‘망국(亡國)의 신민(臣民)’을 자처하던 길재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노모 봉양에 힘썼다. 또 다시 9년이 지난 1400년(정종 2), 조정에서 그를 급히 소환했다. 그가 출사를 주저하자 정부는 역마(驛馬)를 보내면서까지 상경을 재촉했다. 그를 불러들인 이는 당시 세자로 있던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었다.

이방원과 길재는 한 때 수도 개경의 한 동네에서 살았고, 성균관에 진학했을 때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같은 기라성 같은 스승에게 수학한 동학이었다. 국왕 정종(定宗)과 세자를 알현한 자리에서 길재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습니다” 며 은둔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단심(丹心)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면서 세금과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길재는 고향에서 성균관 재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배운 성리학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 제자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교육 활동은 1395년 군수 정이오(鄭以吾)가 전답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는데, 1402년 군수 이양(李揚)의 주선으로 밤실로 이사하면서 본격화 했다. 그의 후진 양성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어, “경학(經學) 하는 선비들로 선생 문하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제자들 가운데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개국 이후 단종(端宗) 치세가 끝이 난 1455년까지 64년 동안, 선산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26명이었다. 전체 합격 인원의 2.6%에 달하는 수치였다(26/1011명). 조선시대 전국 군현 수는 330개 정도였다.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한 고을 당 세 명의 합격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선산은 평균보다 9배가량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합격자의 성적을 살펴보면 이곳 출신 인사들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뒀는지를 알 수 있다. 이곳 출신으로 대과에서 장원(壯元) 혹은 부(副) 장원으로 합격한 이들은 전가식(田可植), 유면(兪勉), 하담(河澹)-하위지(河緯地) 부자, 정초(鄭招), 정지담(鄭之澹) 등 6명이었다. 이들 모두는 선산 읍내 영봉리(迎鳳里)라는 한 마을 출신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훗날 김종직(金宗直)은 영봉리를 ‘장원방(壯元坊)’이라 칭송했다.

1420년(세종 2)에 설립되어 1455년(세조 2)까지 37년 동안 운영된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가운데도 선산 출신이 많았다. 집현전을 거쳐 간 96명의 학사 가운데 선산 출신은 모두 6명(6.3%)이었다. 2품 이상의 재상급(宰相級) 관료로 승진한 이들도 8명이나 되었다. 이런 놀라운 성적으로 미뤄볼 때 조선 개국 이후 60여 년 동안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지역이 선산이고, 중앙 정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들이 바로 이곳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계에서 선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랐다. 김숙자(金叔滋)가 1414년(태종 14)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했을 때, 동료들은 그를 반드시 ‘선산인 김 모’라 불렀다. 아들 김종직은 “선산은 본래부터 풍속이 문학을 숭상한다고 일컬어져 왔으므로, 공[김숙자]을 그 지망(地望)으로 부른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산 인재의 이와 같은 높은 수월성을 스승 길재의 위대성에서 찾는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선산의 우수성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는 문화 융성은 일시적 형상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일정 기간 지속되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 문화를 계승할 인재들이 꾸준히 배출되어야 했다. 선산이 60여 년 동안 최선진 문화지대로 기능한 것은 바로 이곳의 높은 경제 수준, 조밀한 인구 밀도, 꾸준한 인재 배출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선산 읍내 전경.
선산 읍내 전경.

조선 개국 이후 선산은 경상도의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낙동강 수운(水運)과 ‘영남대로’의 육운(陸運)이 교차하고 또 병행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지였기 때문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유통이 활기를 띠게 됨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통관 물화도 늘어났다. 사람과 물화가 집중되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15세기 전반 선산의 인구 밀집도가 김천의 1.5배, 지례의 두 배였던 데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 유통, 교육, 문화가 발달하고 인구가 유입되는 상황에서, 선산은 점차 인구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압력이 이 지역 지식인들로 하여금 신농업기술의 도입과 보급에 적극 나서도록 추동했다.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기술로 주목받은 것은 상경(常耕) 농법과 벼농사였다. 두 농업기술이 채택될 경우, 이전에 비해 최대 4배의 생산성 증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선산에서는 휴경이 소멸하고 상경이 그 자리를 빠르게 메워 갔으며, 수전(水田) 농업이 한전(旱田) 농업의 영역을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32)에 수록된 전체 농경지 대비 선산의 벼농사 비율은 60% 정도였다. 개령 40%, 김천 38%, 지례 33%였던 것에 비하면, 선산의 벼농사 비율은 이들 지역보다 두 배 정도 높았다. 지례와 김천이 벼농사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은 선산보다 인구 밀도가 1/2, 2/3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선산은 경상도 전체에서도 수준 비율이 가장 높은 고을이었다. 선산을 제외하면, 수전이 60%에 육박하는 곳은 동래, 하동, 단성, 의령 등 네 개 군현뿐이었다. 당시 경상도는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농업지대였다. 선산이 경상도에서 수전 비율이 가장 높은 고을이라는 사실은 15세기 전반 이곳이 조선 최고의 농업지대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15세기 전반이라는 시기는 선산만 인구압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 무렵은 나라 전체가 인구 증가로 몸살을 앓았다. 새 왕조 개창 이후 고려 후기의 혼란상이 극복되면서 한 세대 이상 사회가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경제가 발달하고 인구가 불어날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증가한 인구에 대해 이전 수준의 양식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뒤따라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농업기술이 적극 도입되어야 했다.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이 권농정책(勸農政策)을 제1의 국정 목표로 삼고, 국가 주도로 정책을 밀어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태종의 권농정책은 중국의 선진 농업기술의 소개와 수리시설의 확보 등 두 가지였다. 이러한 정책 기조 아래 1273년 중국 원나라에서 편찬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이두로 주해한 『농서집요(農書輯要)』(1417)가 편찬되고, 제언(堤堰), 곧 저수지가 대대적으로 축조되었다. 그렇지만 6년 동안 국가 주도로 추진된 저수지 사업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전국에서 정상 작동하던 저수지는 모두 43개였다. 그나마 선진 농업지대로 평가 받던 경상도가 20곳의 저수지를 보유했을 뿐이다. 태종 대의 권농정책은 애초의 목표에 크게 못 미쳤던 셈이다.

결국 이 과제는 세종(世宗)의 몫이 되었다. 부왕의 정책을 계승한 세종은 농서 편찬, 수리시설의 확보, 천문 관측기구의 제작과 지식 축적 등 세 가지로 사업을 확대시켰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

김성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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