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귀양지의 다산과 주문모 신부의 처형 
20세기 초 중국천주교회에서 창작한 '주문모신부 약전' 연극대본 표지(왼쪽)와 제 8막의 서두 부분 사진. 상해 서가회(徐家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민 교수 제공
 ◇하담의 작별 인사 

1801년 2월 29일에 도성을 떠난 다산은 3월 2일 유배길에 충주의 하담(荷潭) 선영을 들러 성묘했다. 잡초로 뒤엉킨 부친의 묘소 앞에서 다산은 소리 죽여 신음하듯 울었다. “아버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셋째 형님은 목이 잘려 죽었고, 사위 이승훈도 한날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둘째 형님은 전라도의 신지도로 정배 되어 성묘조차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저 혼자 무참합니다. 열심히 산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끝이 날 줄 왜 몰랐던 걸까요?” 회한과 슬픔이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끓어 올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나졸이 길을 재촉했다. 들르게 해 준 것만 해도 길을 한참 돌아온 셈이었다. 다산은 다시 무덤에 절을 올렸다. 이때의 심경이 시 한 수로 남았다. 제목이 ‘하담의 작별(荷潭別)’이다.

아버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父兮知不知

어머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母兮知不知

집안이 온통 모두 뒤엎어져서家門欻傾覆

지금에 죽고 삶이 이러합니다.死生今如斯

남은 목숨 비록 보전한대도殘喘雖得保

큰 바탕은 이미 다 망가졌지요. 大質嗟已虧

자식 낳고 부모님 기뻐하셨고兒生父母悅

품고 길러 부지런히 살피셨지요. 育鞠勤携持

마땅히 하늘 은혜 갚으렸더니謂當報天顯

이렇게 내쳐질 줄 뜻했으리까. 豈意招芟夷

세상 사람 다시는 자식 낳고서幾令世間人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네. 不復賀生兒

다산이 유배지인 장기에 도착한 것은 3월 9일이었다. 관아에 도착 신고를 하고, 이튿날 성 동편 마산리(馬山里)의 늙은 장교 성선봉(成善封)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냇가 돌밭 곁의 외딴 오두막집이었다. 울타리는 잔뜩 높고, 처마 끝엔 그물을 쳤다. 그 위로 긴 창을 꽂아두었다. 연유를 묻자 범과 이리가 많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인네의 말씨는 화난 사람처럼 툭툭 끊어져 무뚝뚝한데, 어찌 들으면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거처라고 내준 방에 생선 비린내가 진동해 비위를 건드렸다. 생선 기름을 짜서 그것으로 등잔을 태우는 까닭이다. 저녁상을 내왔다. 콩을 곁들인 돌김을 젓가락으로 집는데 머리카락이 딸려 올라왔다. 돌벼를 푹 삶아 찐 밥은 한술 뜰 때마다 모래가 같이 씹혔다. 상을 물린 다산은 죽은 듯한 긴 잠에 빠져들었다. 밤새 악몽이었다. 죽은 형의 떨어진 목이 눈을 뜬 채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당시 다산의 심경은 시문집에 실린 ‘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 속에 자세하다.

 
 ◇신부의 자수와 조정의 곤혹 

줄줄이 처형이 이어지던 서울은 돌아가는 상황이 한층 긴박했다. 다산이 마산리 성선봉의 집에 짐을 푼 이틀 뒤인 3월 12일 오후, 웬 낯선 사내가 의금부로 찾아왔다. 아전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던 신부요.” 이 한마디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1795년 이래 지난 7년간 그토록 붙잡으려고 했어도 신출귀몰 꼬리가 잡히지 않던 중국인 신부가 제 발로 의금부에 나타난 것이다.

정약종을 그토록 고문했어도 신부의 소재는 발설하지 않았다. 신부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했던 강완숙과 그의 아들을 붙잡아 죽도록 매질해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참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의금부의 추국이 시작된 이후, 감옥에 가득 찬 천주교도들은 잔혹한 고문 앞에 하나 둘 무너지면서 서로를 끌어들였다. 신부는 책롱 사건 이후 체포령이 강화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집인 양제궁으로 숨어들었다가, 며칠 뒤 황해도 황주 땅으로 피신했다. 그 사이에 줄줄이 붙들려 간 천주교 지도급 인사들의 목이 연이어 떨어져 나갔다. 지방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신부는 목자로서 자신으로 인해 수많은 교우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체포는 단지 시간 문제였다. 주문모가 심문관에게 “제가 자수한 것은 전적으로 피해 숨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에 가까웠다.

포도대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의금부를 찾아가 포도청에서 신부를 체포한 것처럼 아뢰어 달라고 요청했다. 죄를 면하고 공을 세울 궁리가 그 짧은 순간에도 진행되었다. 신부의 자수는 조정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다.

3월 15일 1차 문초가 의금부에서 열렸다. 인정 심문 위주의 문답이 오갔다. 그는 대국인 청나라 사람이어서 조선 조정은 그의 신병 처리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었다. 3월 17일에는 노론 명문가의 종손 김건순이 끌려와 둘 사이에 대질 심문이 진행되었다. 결과에 따라 불똥이 다시 노론에게까지 튈 수 있는 긴박한 대면이었다. 김건순과 강이천의 죄목에는 자칫 역모로 번질 수 있는 뇌관이 박혀 있었다

주문모의 처리를 두고 연일 대책 회의가 열렸다. 북경으로 압송해 돌려보내 자거나 천자께 아뢰어 처리 명령을 기다리자는 축과, 제 발로 온 것은 죽기를 바란 것이니 월경죄(越境罪)의 군율(軍律)을 쓰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대왕대비전의 전교(傳敎)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대비는 소국에서 대국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가 없고 훗날의 근심을 염려치 않을 수 없다고 했다. 4월 1일에 2차 문초가 끝났을 때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주문모가 자수한 뜻이 끝내 의심스럽다. 그가 진짜 외국인이라면 제 나라로 되돌려 보내든 베어 죽이든 간에 장차 두 나라 사이에 틈을 벌이는 일을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남의 사주를 받아 사옥(邪獄)의 계획을 어지럽히려는 것인가? 이제껏 그 연유를 모르겠다.” 죽이든, 살려서 돌려보내든 이제 막 어린 왕을 끼고 수렴청정을 시작한 대비로서는 공연히 청나라를 자극하는 것이 몹시 껄끄러운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대왕대비는 주문모가 의도적으로 이 사단을 일으켜 조선 조정에 혼란을 줌으로써 작금의 처형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책략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다시 보름 뒤인 4월 17일에 3차 국문이 열렸다. 황사영의 소재를 묻는 질문과 모른다는 대답이 오갔고, 의금부는 군율에 따라 효수할 것을 청했다. 주문모는 이틀 뒤인 4월 19일 오후 4시경, 한강변 새남터(沙南基)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처형장의 기상이변 

주문모 신부의 처형장에서도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무릎에 서른 대의 매질을 당하고서야 그는 거리로 끌려나갔다. 주문모 신부는 양쪽 귀에 화살을 꿰고 있었다. 중죄인의 표식이었다.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신부가 말했다. “목이 마르다. 술을 주시오.” 군졸이 술 한 잔을 주자 벌컥벌컥 마셨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목마르다며 포도주를 청했던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재현코자 함이었다. 조리돌림을 하며 도성을 지나올 때 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주교로 이제 여기서 죽을 것이다. 장차 10년 뒤에 너희 나라 안에 앉은 자리에서 불이 일어나리라. 이 위태로운 때가 되면 마땅히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새남터 백사장에 도착한 뒤 관리가 길게 죄목을 읽자, 신부는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청명한 날씨였다. 그런데 신부의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먹장구름이 캄캄하게 몰려들고 광풍이 일었다. 모래사장에 돌이 날리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우레와 번개가 번쩍였다. 한 순간에 지척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한양성을 덮쳤다. 예수의 최후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장안의 모든 백성들이 다 두려워 떨었다. 형장에 있던 관리들은 소름이 쫙 끼쳤다.

형을 다 마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지개가 서고, 폭풍우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해가 다시 나왔다. 이 돌연한 기상 이변은 당시에 실제로 벌어진 일인 듯 여러 기록이 한결같다. ‘눌암기략’ 조차도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형벌을 받는 날은 매번 돌풍이 세게 일었다. 또 목을 베던 날은 큰 우레와 비가 쏟아졌다. 대개 그가 좌도(左道)를 끼고 있어 그랬던 것일까?”

 ◇20세기 초 중국에서 지은 연극 대본 ‘주문모약전’ 

이 장면에서 특별히 소개해야 할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다. 2017년 중국 광서사범대학(廣西師範大學) 출판부에서 펴낸 ‘한어기독교진희문헌총간(漢語基督敎珍稀文獻叢刊)’ 제1집 10책의 영인본 중 제10책은 중국에서 간행된 조선천주교회에 관한 한문 기록을 모았다. 여기에 앞서 소개한 바 있던 ‘고려주증(高麗主證)’과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史略)’의 영인본이 실려 있다. 그 끝에 놀랍게도 주문모 신부의 일대기를 정리한 ‘고려치명주아각백전략(高麗致命周雅各伯傳略)’이란 필사본이 수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중국 서가회(徐家匯) 쪽에서 주야고보(아각백은 야고보란 세례명의 중국식 표기다) 신부의 일대기를 모두 10막으로 구성해서 올린 연극 대본이다.

윤유일이 북경 주교를 찾아가,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권일신 프란치스코의 장서(長書)를 전달하는 장면에서 제1막을 시작해, 주 신부의 순교까지를 다룬 대작이다. 매 1막마다 주요 내용이 8자 2구로 요약되었고, 이어 등장인물을 소개한 뒤, 지문과 대사가 나온다. 이 중 제 8막은 제목이 “주신부가 자수하여 관아에 이르니, 심판관이 참수형을 판정하다(周司鐸自投到衙門, 審判官判定斬首刑)”이다. 막이 열리면, 주 신부가 혼자 나와 이렇게 독백한다.

“이제 천주의 거룩한 명령이 이미 이르렀구나. 보아 하니 고려의 교우들이 이 귀한 고통을 기꺼이 받는 것은 나 한 사람을 살리려 함이로다. 내가 천주께 빌어 내게 힘을 주시고 용감하고 굳세게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리라. 착한 목자는 양 떼가 목숨을 잃는 것을 잘 보살피는 사람이다. 양 떼를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목숨을 버리리라. 지금은 천주를 위하고 교우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때다. 이것이 나의 본분일진대 두려워하지 않겠다.” 자수에 앞서 각오를 다지는 대목이다.

제9막은 “형장에 끌려온 주신부가 치명하매, 큰 우레와 비가 쏟아지는 변고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押法場周司鐸致命, 大雷雨天變驚醒人)”로 마지막 죽음의 장면을 그렸다. 연극은 제10막에서 “주신부가 순교의 영광을 얻고, 고려 사람은 지금껏 그를 잊지 않고 있다(周司鐸致命光榮, 高麗人至今不忘)”고 끝난다. 주 신부의 생애를 회고하며 후일담을 낭독하는 것으로 막이 닫힌다.

창작된 지 100년쯤 된 이 놀랍고 흥미로운 필사본 자료는 이제껏 한국 천주교회에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다.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오를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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