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불편했던 지점들 
 페미니즘 공부하며 명확해져 
 “중고등학생 때 접했다면…” 
 <8> 페미니즘 

“여자답게 부드러운 성격이네.” 칭찬으로 한 말인데, 듣는 20대는 정색을 해 당황한 적 있으신가요. “너도 김치녀니?” 비싼 가방을 산 여학생을 꾸짖는다고 한마디 했는데, “네! 저 김치녀예요!” 라며 당당히 맞받아쳐 놀란 적 있으신가요. 밀레니얼 여성은 더 이상 여성스럽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성의 시선으로 자신을 검열하지 않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 전선에서 겪는 부당함에 순응하지 않고 단단한 남성 중심적 사회에 균열을 내기로 마음먹은 밀레니얼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이 지난 2월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초ㆍ중ㆍ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와대 청원에 대한 입장발표 및 정책 제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페미니즘, 우리는 직접 보고 배운 세대 

반포젠틀남(메신저 대화명)=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사건이야. 지금까지 느꼈던 부당함, 수많은 의문이 여성 혐오의 결과였단 걸 깨닫고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 또, 전 애인과 페미니즘 관련 문제를 놓고 자주 다퉜는데, 그때 ‘어머, 나 완전 페미(페미니스트의 준말)네’하고 생각했지. 책으로 공부하기보다는, 생활 속 경험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게 된 셈이야.

왕만두= 우리 집은 딸만 둘이라, 가정 내에선 크게 부당한 대우를 경험해 보지 못했어.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여성들의 외모나 행동이 쉽게 품평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접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 한 번은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교환학생 다녀온 여자는 걸러야 한다”며 상스러운 말을 하는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여성을 쉽게 성적 대상화하면서도 유독 여성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페미니즘을 알고 난 후에야 모든 게 설명이 됐어.

뚜벅이= 소설 읽는 걸 좋아하는데, 우연히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페미니즘 소설을 읽고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됐어. 이후 ‘쇼코의 미소’ 등 여성주의적 시각이 담긴 소설을 더 많이 접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넓혔지.

핑거스냅=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투 운동이야. 페미니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래디컬 페미니즘(급진적 여성주의)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바탕이 되는 사회 문제들이 젠더 갈등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면서, 한 명의 남성으로서 내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페미니즘에 대해 더 알아보게 됐지.

 ◇곳곳에 만연하는 차별…이제는 안 참죠 

반포젠틀남= 페미니즘을 접한 후로 연애관도 달라졌어. 예전에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든가,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는 사소한 행동의 통제가 사랑에서 비롯된 구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단순히 개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권력 구조에서 비롯되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지. 이제는 데이트 폭력과 사랑을 구분할 줄 알게 됐어.

핑거스냅=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남성성에 대한 프레임을 느낀 적이 많아. 예전에 대학교 MT를 갔을 때, 남자들만 두 손 가득 1.5L 생수통들을 들고 다녔거든. 그때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또 난 옷에 이물질이 묻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항상 사람들은 ‘남자가 털털하지 못하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이럴 때마다 남자니까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남자니까 털털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운다는 느낌을 받았어.

반포젠틀남= 다 사회가 만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야. 만약 남성성에 대한 프레임이 없었더라면, 그런 상황에서 남자들만 물병을 들지는 않았을 거야. 너도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 역할의 피해자인 거지. 이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말하는 게 페미니즘이야.

[저작권 한국일보]남녀가 생각하는 페미니즘_신동준 기자/2019-06-10(한국일보)

왕만두= 학교 생활 얘기하니까 생각나는데, 우리가 20대에 들어 페미니즘이 촉발됐잖아. 그런데 중ㆍ고등학생 때 페미니즘을 접했다면, 그때부터 학내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 의식을 가졌을 거야. 대학에 들어와 성차별적 언행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때 문제의식을 곧바로 갖지 못했던 게 화가 나. 2016년도에 우리 학교 공학부 단톡방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입에 담기 힘든 성희롱적 발언이 오갔던 사건이 있었어. 한 남학생이 학교 휴게실에서 잠든 여학생의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렸고, 다른 남학생들이 “과방으로 데려가라” “형 못 참는다”라는 말을 주고받은 거야. 또 동기 여학생을 두고 “OO이 메갈(메갈리아)이냐” “김치냐”하는 등 여성 혐오 발언도 당연하게 했더라. 사건이 공론화되자 가해자들이 사과했지만 형식적인 수습으로 보일 뿐이었지. 이런 단톡방 사건은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이 아냐. 몇 년 전에는 남학생들 사이의 당연한 문화였지만,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거지.

올빼미=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조롱을 받아. 집에서는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 우리 부모님은 아들이란 이유로 나를 유독 보호하셨어. 항상 궂은일은 누나 몫이었고, 나를 위해 누나의 희생을 강요하셨지. 책 '82년생 김지영'의 내용이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어. 딱 우리 누나 이야기 같더라니까.

여성인권단체 회원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기자회견을 열고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을 상징하는 천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업문화에서의 성 평등, 새로운 시각 필요 

올빼미= 취업을 준비하면서 남녀의 경우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어. 우리 사회는 유독 여자의 나이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그러다 보니 여학우들은 '칼 졸업, 칼 취업'의 압박이 큰 것 같아. 반면에 남학우에게 나이는 큰 걸림돌이 아니야. 당장 나만 해도 "남자는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많이 경험해 봐라"는 말을 듣곤 하거든.

반포젠틀남= 취업 시장에 있어 여자의 나이를 중시한다든가, 입사 후 여성을 향하는 엄격한 잣대들은 기업 문화를 주도해 온 사람들이 주로 남성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야. 그렇게 만들어진 남성 중심적 문화는 남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재생산 돼. 그 속에서 여성들은 인정받기 위해, 또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지.

왕만두= 기업 내 남성 중심 문화를 바꾸려면 기업 문화를 리드하는 고위직에 더 많은 여성이 있어야 해. 내가 아무리 성 소수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법을 만들고 싶어도 나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성 소수자가 일상에서 겪는 차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남성들이 여성을 배려한 기업 문화를 만드는 데엔 한계가 있어. 성 평등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선 결국 여자가 고위직에서 더 많아져야 하는 거지. 그렇게 된다면 채용이나 조직 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수자적 정체성에 기반한 판단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올빼미= 맞아. 소수자가 특정 직군에 진입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라면 채용 비율을 어느 정도 맞추려는 정책도 필요해. 건강한 조직을 위해서는 조직 내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일각에서는 여성 할당제뿐 아니라 소수자 관련 정책을 역차별이라고 비판하기도 해. 하지만 기울어진 구조를 바꾸는 정책은 큰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어. 이걸 역차별이라고 낙인찍으면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바뀌지 못할 거야.

 ◇여성 혐오의 반대는 남성 혐오? 

반포젠틀남= 요즘에는 여성 혐오 못지않게 남성 혐오도 심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난 남성 혐오가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남성 혐오의 실체에 대해 말하려면, 혐오라는 단어가 지닌 맥락을 이해해야 해. 사회적 의미의 ‘혐오’는 대상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대상화와 차별, 배제를 포괄하는 단어야. 또 사회적 혐오라는 건 과거에 차별받았고, 지금도 차별받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도 차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성립하지. “여성 혐오를 하지 않는다”거나 “남성 혐오도 하지 마라”는 말들이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흔히 혐오를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인 것 같아.

뚜벅이= 이건 다른 소수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야. 예를 들어 ‘개독’이 기독교 혐오 표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이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아직 남성 혐오가 실재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는 ‘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되지 않은 탓이 커. 결국 단어의 정의에 대한 전제가 합의되지 않으면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사람들에게 혐오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더 설명해야 하고, 이 문제가 더 공론화되어야 해.

핑거스냅= 난 남성 혐오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앞서 말했듯, 현재의 사회적 혐오는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물론 혐오라는 단어를 현실의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개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지 여부에 따라 혐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권력 구조 상위의 남성은 이러한 표현에 위협 또는 불쾌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하는 조롱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

올빼미= 남성 혐오가 여성 혐오의 대립 항처럼 쓰이지만 남성 혐오는 성립한다고 보기 어려워. 남성은 젠더 권력 구조에서 하부에 있지 않아. 아직 젠더 권력 구조에서 약자는 여성이야. 인터넷상에서 ‘맘충’ ‘김치녀’ ‘된장녀’라는 말들로 무심코 행해지는 여성 혐오가 불법 촬영, 성폭력, 살인 같은 극단적 범죄들로 이어지기도 해. 얼마 전 버닝썬 사건과 승리 단톡방 대화 내용에서 드러난 일련의 성범죄들도 일상화된 여성 혐오의 연장 선상이 아닐까. 여성 혐오적 표현과 소위 ‘남성 혐오’적이라고 하는 표현이 개인의 생존에 미치는 위협은 분명히 달라. 만약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권력 구조가 전복된다면 ‘남성 혐오’가 존재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아직 남성을 위협하는 ‘남성 혐오’ 가 실재한다고 볼 수는 없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탓할 것인가 

반포젠틀남= 최근 워마드에서 순직 해군을 조롱한 사건이 있었어. 많은 남성이 분노했지. 나도 그 글을 읽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그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이해는 가. 일베와 워마드는 목적이 구분되는 집단이야. 워마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여성 혐오에 대한 미러링으로 등장했지만 일베에 혐오 표현은 그저 유희일 뿐이잖아. 미러링의 본래 목적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올빼미= 고착화된 구조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급진 운동이 나타날 수 있어. 그런데 그런 표현 방식에 거부감이 든다고 방식만 비난하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는 거지. 그런 표현 방식에 거부감이 든다면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면 돼. 운동 방식에 대한 논쟁은 노동 문제 등의 여타 사회적 이슈에 늘 등장해 왔어. 예를 들어 고공 농성이나 삭발도 사회적 약자의 저항 방식이잖아.

왕만두= 미러링이든 고공농성이든 과격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을 택한 건, 그들에게 남은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미러링을 택한 페미니스트들도 그게 타인의 반감을 사기 쉽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 얘기를 들어줘”라고 점잖게 말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잖아.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거울을 들고 여성 혐오를 비추기 시작한 거지. 친절한 방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구조에 저항하라는 것은 약자들더러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어.

핑거스냅= 여성 혐오 언행이나 행동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에 동감해. 주변 이야기를 들어봐도 남성보다 여성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 그런데 나는 달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달을 어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지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어떤 손가락이냐에 따라 사람들은 달을 볼 수도 있고, 손가락에만 치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불법 촬영이나 조롱 글, 특히 순직한 해군 조롱 사건들이 목적성을 상실한 폭력일 뿐이라고 생각해. 내 눈에 그런 언행은 사회적 운동이 아닌 그들만의 유희와 조롱으로 보였어.

 

※기성세대는 ‘나약한 세대’라 손가락질하지만 스스로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길을 가는 세대’라 부르며 뿌듯해하죠. 고용 감소, 일자리 질 저하 등 부모 세대가 경험하지 않은 앞날을 마주해 비장하면서도 유쾌한 이들. 우리가 어렴풋이 떠올리는 밀레니얼 세대(millenialsㆍ198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 출생)의 이미지가 아닐까요. 한국일보는 밀레니얼 세대가 지닌 잠재력, 그들이 미처 어필하지 못한 속내를 이해하고자 밀레니얼 세대를 대표하는 본보 인턴기자들의 방담(放談) ‘밀레니얼의 수다, 솔ㆍ까ㆍ말’을 연재(매주 화요일)합니다.

정리=정예진 인턴기자

참여=홍윤기, 김한길, 주소현, 최한솔, 임태형, 화이투 인턴기자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