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총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 자질을 타고났다고 기대를 많이 걸었던 YWCA 어른들은 김대중씨와의 결혼을 반대하기로 했다. 조건이 나쁜 그와의 결혼으로 좋은 일꾼 하나 빼앗기고 앞으로 여성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이화여전 스승이자 대한YWCA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갑순 선생의 회고다. 이 여사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출신 여성운동가였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그의 꿈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이 겪은 5번의 죽을 고비, 6년의 감옥생활, 10년의 망명 및 연금생활을 함께 견뎠다. 민주화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 곁에서 그의 정치적 동지가 되어줬던 이 여사는 10일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한 지 10년 만에 ‘인동초’의 곁으로 돌아갔다.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이 여사의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 가난하고 성차별적인 시절 유복하고 평등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9월 21일 서울 수송동 외가에서 6남2녀 중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이 여사의 조부모는 오랜만에 얻은 손녀딸을 각별히 예뻐해 돌림자를 넣어 ‘희호’라는 이름을 지었다. 의사였던 아버지 덕에 이 여사에겐 배고프고 궁핍했던 기억이 없다.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렀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 “그 시절 굶지 않고 아들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감리교 미션스쿨인 이화고녀(여고)를 거쳐 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지금의 이화여대)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일제 횡포가 극에 달한 암흑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12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이 내려지면서 문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과가 문을 닫았다. 학업을 중단한 이 여사는 해방 이후 46년 9월 국립 종합대학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전과해 교육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재학시절 이 여사의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다스(das)’였다. 남녀공학에서 뿌리깊은 가부장제를 처음 마주한 그는 곧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몰두했다. 그리고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와 처우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이 여사는 면학동지회라는 학생단체 결성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이 단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면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후일 그가 운명의 동반자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곳이 바로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면우회 모임이다.
미국 유학과 여성 운동
이 여사가 서울대를 졸업한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 해 대한여자청년단을 조직했고, 2년 뒤에는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한 ‘여성문제연구원’ 발족 실무를 도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여사가 처음 선거운동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박순천 캠프를 도운 그는 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누리며 외쳤다.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
서른 두 살, 이 여사는 만학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 스칼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공부한 영어는 두고두고 그의 자산이 됐다. 남편의 의정활동을 돕기 위해 영자지를 스크랩할 때도, 해외에서 온 격려편지에 답장을 쓸 때도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른 일곱의 엘리트 신여성 이희호는 여성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여성계를 선도하던 엘리트 집단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총무를 맡아 축첩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 각종 여권 신장 운동을 벌였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
62년 5월 이 여사는 평생의 반려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한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노모, 아픈 여동생을 거느린 정치 재수생이었다. 운도 매번 그를 비켜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민의원 선거에서 낙마했고, 58, 59, 60년 선거에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ㆍ16 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여사의 주변에는 그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보다 말리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연인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그를 도와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밝혔다.
60년대 10년간 애정을 가지고 투신했던 여성운동가로서의 직함은 결혼과 동시에 하나 둘 손에서 놓아야 했다.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애정을 가지고 간여했던 NGO는 여성문제연구회였다. 이 여사는 64년 2대 회장으로 취임해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 해결과 정치의식 함양을 위한 연구활동과 캠페인을 전개했다. 7년 뒤인 71년 1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여사는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김대중 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동교동의 짧은 봄, 긴 겨울
가족이 동교동으로 이사한 건 결혼 이듬해인 63년이다. 대문에는 부부의 문패가 나란히 걸렸다. “부부는 동등하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모범 보이자”는 김 전 대통령의 뜻이었다.
행복도 잠시, 72년 계엄령과 함께 동교동에는 긴 겨울이 찾아왔다. 김 전 대통령을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은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이 여사로서는 마음 졸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73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도쿄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고 했다. 기적적인 생환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재야활동을 계속했고, 가택연금과 투옥이 반복됐다.
12ㆍ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혐의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죄. 거짓 모함이었지만 이 일로 아들들까지 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었다. 이 여사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온 힘을 다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가계를 홀로 꾸려나가면서 남편의 심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옥바라지에도 지극정성이었다. 미국 망명시절과, 이후 54차례 이어진 가택연금 때도 그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참모로 묵묵히 곁을 지켰다.
대선 3전4기와 청와대 입성
김 전 대통령은 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지만 87년, 92년 대선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당시 이 여사는 남편의 정치활동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정책을 국회에 제시했다. 상속과 이혼문제에서의 남녀차별 요소를 삭제한 가족법 개정안이 89년 통과된 데에도 이 여사의 공로가 알게 모르게 숨어있었다.
92년 대선 이후 은퇴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은 3년 뒤 지방선거 지원 유세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리고 97년 5월 당내 경선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대통령이 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이 여사는 여느 선거 때처럼 남편의 유세를 적극 지원했다. 특히 여성단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과거 분열로 낙선의 쓴맛을 봤던 김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서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씨와 손을 잡아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헌정 사상 처음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푸른 기와집에서의 5년… 다시, 동교동으로
“남편은 준비된 대통령이지만 나는 준비된 영부인이 아니었다.” 이 여사는 남편의 취임 직후 상황을 회고하며 이렇게 밝혔다. 여성가족부 신설 등 김 전 대통령이 진보적인 양성평등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부 여성정책 뒤에는 이 여사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남북 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등 영광의 순간에도 이 여사는 몸을 낮췄다. 다만 유엔 아동특별총회 연설이나, 결식아동을 돕는 ‘사랑의 친구들’ 발족, 입양아 돕기 등 약자를 돕는 일에는 각별히 힘을 쏟았다.
청와대 입성 후에도 시련은 끈질기게 찾아왔다. 임기 말 자식들의 비리가 쏟아졌고 둘째, 셋째 아들이 구속돼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2003년 2월 동교동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참모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하지만 이 여사에게 가장 큰 아픔이 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임종 당시 이 여사는 얼굴을 맞대고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 전 대통령은 부인이 손수 만든 장갑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이 여사는 백세에 가까운 장수를 누렸다. 동교동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도, 촛불집회도 조용히 지켜봤다. 노환으로 기력이 쇠하는 와중에도 늘 맑은 정신으로 손님을 맞았고, 정권 교체로 새 정부가 들어섰을 때 특히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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