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美대사 ‘反화웨이’ 동참 요구… 美 “희토류 한국과 공조”
中 “한국, 올바른 판단해야”… 정부, 어떤 선택 해도 보복 우려
무역 전쟁에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에서 우리가 ‘중립’ 위치를 버리고 한쪽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코앞으로 닥쳐들고 있다. 세계 각국을 상대로 한 ‘줄 세우기’ 속도가 시간이 갈수록 가팔라지는 가운데 두 나라 모두 대결의 승패를 좌우할 핵심지역으로 한국을 지목하고 있다. 이달 들어 표면화한 ‘중립포기’ 요구는 5일 주한 미국 대사가 직접 나서는 등 더욱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반대편의 심각한 보복이 우려돼 당국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해리 해리스 미국 대사는 이날 한국 정부에 사실상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을 공개 요구했다.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말했듯 세계는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원한다”며 “믿을 수 없는 공급자를 선택하면 장기적인 리스크와 비용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5G 통신망 구축에 화웨이 장비를 쓰는 국내 기업에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이는 지난달 말 ‘반화웨이 전선에 한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이냐’는 질문에 미 국무부가 “모든 국가가 5G 통신망 구축에서 위험평가 기반의 보안체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우회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기도 하다.
미국 상무부도 한국에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 불가피한 선택을 요구했다. 미 상무부는 전날 공개한 ‘필수 광물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연방정부 전략’ 보고서에서 국제 협력을 강조하며 “캐나다, 호주, 유럽연합(EU), 일본, 한국과 공조를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희토류 공급중단을 미국 및 그 동맹국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이탈을 막기 위해 미국이 쐐기를 박은 셈이다. ‘매우 드문 금속 원소’라는 의미인 희토류는 스마트폰과 배터리, 전기ㆍ하이브리드 자동차, 풍력발전 등 각종 전자제품이나 첨단무기 제조, 미래기술에 필수적인 17가지 광물질로 중국이 전 세계 관련 공급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도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 외교부 당국자는 최근 ‘미중 무역 갈등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한중 관계에 또 다른 악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 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 동맹을 존중한다”면서도 “중국의 안보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중국 정부가 이달부터 한국인에 대한 상용 비자 발급 절차와 심사 조건을 대폭 강화한 것을 ‘반화웨이 전선에 참여하지 말라’는 압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양국 요구가 거세지면서 정부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우선 외교부에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연구할 전담조직을 두는 작업이 시작됐다.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대표들과의 회동, 자유한국당 대표와의 단독회담 등을 추진하는 것도 관련 문제에 대한 국론통일 필요성 때문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 심각한 건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20~30년간 지속될 수 있는 미중 패권전쟁에서 한국은 계속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미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을 기회주의적인 국가로 판단하고 있어 이제는 선택마저 늦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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