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잘 이겨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얼까. 그것은 단지 불굴의 의지만은 아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은 마치 자신도 모르는 몸속 면역력처럼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단련되어온 회복탄력성이다. 이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일상 속의 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내면의 희열, 즉 ‘블리스(Bliss)’를 가꾸는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이라고 믿는다.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모든 기쁨이다. 시간뿐 아니라 슬픔과 번민도, 세상조차도 잊게 만드는 내적 희열이 바로 블리스다. 꽃을 가꿀 때 모든 슬픔을 잊는다면 그것이 블리스고, 음악을 들을 때 모든 번민을 잊는다면 그것이 블리스다. 아기의 입속에 과자를 넣어줄 때 아기가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블리스가 될 수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면 세상만사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블리스다.

블리스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마음의 내적 자원(inner resource)이다.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블리스가 있는가 하면, 작가의 글쓰기나 화가의 그림그리기처럼 인생을 걸어야 비로소 절실하게 만날 수 있는 블리스도 있다. 두 가지 모두 우리 인생에 필요한 내적 자원이다. 내가 상처를 치유하는 블리스의 힘에 대해 강의를 하자, 나의 오랜 제자 H가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블리스를 설명할 때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해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더니, H는 의기소침해졌다. 블리스를 가꾼다는 것이 뭔가 너무 어렵고 무시무시한 과업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에겐 블리스가 전혀 없는 걸까’하고 고민했다는 H가 얼마 전에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뜻밖의 블리스를 발견했다.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얼굴을 볼 수 없던 수많은 친척들을 만났는데, 친척들의 온갖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바로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아기자기한 사연들을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듣는 것 자체가 블리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 상황이 마냥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눈부신 선물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고 가버린 누군가를 살짝 험담하는 것조차도, 도마뱀을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척들의 이야기도, 필라테스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 친척의 이야기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줄 알았던 그 모든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이 H에게는 블리스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 속에서, 끊어졌던 모든 인연이 다시 이어 붙여지는 바로 그 ‘연결’과 ‘접속’의 느낌 속에서, H는 시간을 잊고, 슬픔을 잊고, 번민을 잊었던 것이다.

나의 블리스는 이렇게 나와 한 번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H는 내가 시간강사로 첫출발을 하던 해에 만난 제자이고, 벌써 15년 넘게 나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이렇게 나와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잊지 않고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따스함을 나누는 일, 그것이 나의 눈부신 블리스다. 제자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블리스를 가꾸었더니 정말 트라우마가 낫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귀신도 밤도 두렵지 않아요.” 나의 블리스는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어렵사리 꺼내어 보여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 개인적인 연락을 할 수 없더라도, 그들이 나를 볼 수 없는 시공간에서도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도록,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의 블리스는 ‘진지충’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매일 읽고 쓰고 강의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블리스를 빼앗기면 나는 나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매일 읽고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매일 읽고 쓰기를 통해 얼굴을 볼 수 없는 모든 사람들과 너무도 깊은 인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글쓰기를 통해 나의 인연을 소중히 가꾸는 일, 그것이 내게는 당신과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블리스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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