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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세계 민주주의] 뉴질랜드 아던 총리처럼... 포용이 극단 증오 녹인다

입력
2019.06.05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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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중도가 살아남는 법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총기 난사 테러 발생 이틀째인 지난 3월 17일, 수도 웰링턴의 한 사원을 방문한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히잡을 쓴 채로 한 이슬람 여성을 껴안고 위로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며칠 뒤인 22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에 아던 총리의 모습과 함께 ‘평화’라는 뜻의 아랍어와 영어가 투영된 모습. 웰링턴·두바이=AP·EPA 연합뉴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총기 난사 테러 발생 이틀째인 지난 3월 17일, 수도 웰링턴의 한 사원을 방문한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히잡을 쓴 채로 한 이슬람 여성을 껴안고 위로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며칠 뒤인 22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에 아던 총리의 모습과 함께 ‘평화’라는 뜻의 아랍어와 영어가 투영된 모습. 웰링턴·두바이=AP·EPA 연합뉴스

지난 3월 22일 세계 최고층 빌딩인 중동 두바이 부르즈칼리파에 서방 세계 지도자 얼굴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히잡을 쓴 채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총격 사건’ 피해자 가족을 껴안고 위로하는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였다.

테러에는 단호히 대응하면서도, 피해자 무슬림을 포용한 아던 총리에게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국제적 찬사가 쏟아졌다. 미 뉴욕타임스(NYT)가 아던 총리의 포용력을 도널드 트럼프(미국), 빅토르 오르반(헝가리), 나렌드라 모디(인도) 등 반무슬림ㆍ반이민 성향 독불장군 정치인이 득세하는 상황의 대안으로 칭송했을 정도다.

영국 가디언도 “아던은 세계에 ‘지도자란 이래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가족 포옹과 히잡 착용이 보여주기 쇼가 아니라면서 새로운 총기 규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혐오발언 규제 등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힘쓴 아던 총리를 높이 평가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영국 EIU가 발표한 '2018 민주주의 지수' 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영국 EIU가 발표한 '2018 민주주의 지수' 박구원 기자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양극화와 분열로 앓고 있지만 모든 나라가 그런 건 아니다. 기득권 정치 세력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하고 지친 유권자들은 그것이 우든 좌든 반체제이든 새로운 정치 세력과 스트롱맨 리더십에 마음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뉴질랜드처럼 드물지만 대화와 타협의 정치,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이는 국가들은 여전히 중도ㆍ포용 정신의 민주주의가 21세기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낼 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 연구기관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그래도 아직 민주주의의 원칙이 잘 작동하고 있는 나라가 어딘지를 알려준다. 매년 ‘세계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하는데 2018년 뉴질랜드(9.26점ㆍ4위)와 함께 상위권에 오른 나라가 그들이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AP 연합뉴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AP 연합뉴스

이와 관련, 가디언은 “캐나다(EIU순위ㆍ6위)와 아일랜드(6위)에서도 뉴질랜드와 비슷한 노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2017년 1월 퀘벡 이슬람 문화 센터에서 발생한 총격사건 1주년 추모식에서 저스틴 트뤼도 총리는 “이슬람 혐오와 모든 차별에 당당히 맞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의 인도계 게이 총리인 리오 버라드커도 정기적으로 이주민ㆍ난민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 리차드 헤이데리안은 아던(38), 트뤼도(47), 버라드커(40) 같은 젊은 지도자들을 ‘대안적 포퓰리스트’라고 묘사한다. ‘기득권과는 거리를 두는’ 신예 정치인이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대중적 수사’와 ‘카리스마’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적 면모가 보이지만, 실제 정책이나 이념은 중도ㆍ온건 성향이라는 것이다. 중도적인 정책 개혁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지지 기반 확보를 위해 겉보기 ‘포퓰리즘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대안 없이 극언만 퍼붓는 ‘나쁜 포퓰리스트’는 엄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스웨덴이 지난해 9월 총선을 실시한 이후 3개월이 가깝도록 정부 구성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던 가운데,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당을 이끄는 스테판 뢰벤 현 총리가 11월 23일 차기 후보자로 지명돼 스톡홀름 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스웨덴은 이듬해 1월이 돼서야 가까스로 연정을 꾸렸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뉴스
스웨덴이 지난해 9월 총선을 실시한 이후 3개월이 가깝도록 정부 구성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던 가운데,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당을 이끄는 스테판 뢰벤 현 총리가 11월 23일 차기 후보자로 지명돼 스톡홀름 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스웨덴은 이듬해 1월이 돼서야 가까스로 연정을 꾸렸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뉴스

극단 세력을 배제하고, 온건 세력과 손을 마주 잡는 ‘타협의 정신’도 중도가 살아날 방법으로 꼽히고 있다. 북유럽의 스웨덴(EIU 순위ㆍ3위)이 그런 나라다. 지난해 9월 스웨덴 총선에서는 신나치에 뿌리를 둔 ‘스웨덴 민주당’이 제3당으로 급부상했지만, 집권연립여당(사민당+녹색당+좌파당)과 중도우파 성향의 야권연맹(보수당+중앙당+자유당+기민당) 모두 ‘스웨덴 민주당’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연정 구성 작업에 난항은 있었으나 131일 만인 지난 1월 21일 극우 정당이 빠진 연정이 출범했다. 이는 집권 사민당이 부유층 감세 등 일부 우파 정책을 내주는 대신, 난민에 비교적 관용적인 중앙당·자유당 세력의 양보를 받아내는 식으로 타협한 덕이었다. 안데스 이게만 사민당 대표는 “많은 나라에서 극우가 커지는 시대에 스웨덴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자평했다.

마케도니아가 '북마케도니아'로 국호를 공식 변경하기 하루 전인 지난 2월 12일, 수도 스코페의 정부 청사 앞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기 게양식에 참석한 조란 자에브 총리가 대국민연설을 하고 있다. 스코페=EPA 연합뉴스
마케도니아가 '북마케도니아'로 국호를 공식 변경하기 하루 전인 지난 2월 12일, 수도 스코페의 정부 청사 앞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기 게양식에 참석한 조란 자에브 총리가 대국민연설을 하고 있다. 스코페=EPA 연합뉴스

최근 이름 앞에 ‘북’ 자를 새로 붙인 북마케도니아도 모범 사례다. 1991년 마케도니아 독립 직후부터 이웃나라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가 자국 영토 북부에 있었다는 점을 내세우며 개명을 요구했고, 양국 간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오랜 ‘이름 분쟁’을 끝낸 것은 2017년 5월 들어선 사민당 정부였다. 지난해 6월 그리스 정부와 개명에 합의하는 대신, 그간 마케도니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유럽연합(EU) 가입을 막아 온 그리스도 반대 입장을 철회했다.

그리스와의 타협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조란 자에브 총리의 실용적 판단과 끈질긴 설득 노력 때문이었다. 국호 변경은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강력 반발한 극우 세력 등은 자에브 총리를 ‘마케도니아의 배신자’로 매도했다. 그러나 자에브 총리는 나토ㆍEU가입이라는 실리를 내세우는 설득 작전으로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싱크탱크 유럽안정매커니즘(ESI)의 분석가 아드난 체르마게지는 “타협하고 평화적인 협력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어떻게 ‘고착화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선례”라고 극찬했다.

※ 미국ㆍ유럽 등 서구 선진국부터 남미까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로 인해 대화와 타협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가 앓고 있습니다. 3회 연재로 전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과 대안을 모색합니다. - 글 싣는 순서 <상> 밀려나는 주류세력 <중> 위태로운 극단세력 <하> 중도가 살아남는 법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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