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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루밍 성범죄, 치유자의 두 얼굴

입력
2019.06.05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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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굿 닥터의 위험한 진료’. MBC 캡처
PD수첩 ‘굿 닥터의 위험한 진료’. MBC 캡처

10년 넘게 좋아하던 책이 있었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건강히 수용하게 하는 유명한 심리 서적이었지요. 대학생 시절, 처음 접한 실연 앞에서 몇 날을 울다, 도서관에서 운명적으로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지나 상담가가 되어서는 내담자들에게 종종 권하곤 했습니다. 내가 역부족일 때, 또 다른 누군가의 글로라도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그렇게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이 책의 저자가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떴더군요. ‘새 책이 나왔나?’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지만, 이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루밍 성범죄 의혹을 받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루밍 성범죄란, 어린이나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피해를 보고 있음이 알려졌습니다. 심리전문가, 종교인들이 주요 가해자로 떠오르면서 성인이라고 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지요.

2016년 유명 심리상담사 준간강 및 몰카 촬영 혐의, 2018년 인천 목사 성범죄와 여성 내담자를 숙박시설로 유인해 성폭행한 유명 심리치료연구소장 등 사건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만 판례는 아직 미묘합니다. 아동이나 청소년에 비해 성인 대상의 그루밍 성범죄는 무혐의와 무죄 판결이 상당수이지요. “피고인의 나이ㆍ학력ㆍ관계 등을 종합해 보면 인정하기 힘들다.” 모 판례 속에는 어느 정도 스스로 거부하거나 피할 수 있지 않으냐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정서적 취약 상태인 사람들이, 타인의 심리 정서를 진단하고 제어할 수 있는 직업군의 사람이 시켜서 어떤 행위를 하게 될 때, 어디부터가 자의이며 어디부터가 타의인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을지요. “그걸 시킨다고 해?”라는 질문은 어쩌면 정서적 취약 상태에 있는 사람을, 비질환자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리적 힘의 차이보다 정신적 힘의 차이가 더 무서운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새 스미듯 종속되고, 심지어 종속되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담입니다만, 몇 년 전 꽤 알려진 교육벤처가 있었습니다. 삶과 진로에 대해 같이 공부하는 곳이었지요. 그곳 수강생이 때때로 상담을 받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은 그곳에서 아픔이 회복되고, 삶의 희망을 얻었다더군요.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곳에서 나오지는 못하는 겁니다. 일종의 금단 증상이랄까요. 학기가 끝나면, 고액의 수강료를 모으기 위해 무리해서 알바를 하고, 심지어 퇴직금을 당겨 받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계속 그곳 안에서 존재하려면, 계속 수강료를 내야 하니까요. 나이와 학력, 경험의 정도가 다 다른데도 같은 패턴을 보이는 그들의 공통점은 ‘마음이 비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채우려는 절박함이, 오히려 자신의 자생력을 더 빼앗아가는 선택을 하게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사실 정신적 결핍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기는 상당히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치유자는 그 힘든 일과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소명을 가지고 묵묵히 이어나가기에, 분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악인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결핍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종속되게 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를 통해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것도요.

아픔을 안고 당신을 찾은 이들을 더 큰 아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가해자들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했지만, 앞으로는 기억에서 지워야 할 그 책의 이름을 패러디해서 말이지요. 지금까지 세상이 당신들을 처벌하지 않았더라도, 앞으로는 점점 당신들이 뿌린 씨앗이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세상이 될 거라고요.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악행은 없다’라고요.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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