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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세계 민주주의] 타협하면 배신자 취급...포퓰리즘에 ‘혼란의 수렁’

입력
2019.06.04 04:40
수정
2019.06.04 05:4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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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태로운 극단 세력

지난 달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 브렉시트당이 창당 2개월 만에 31.5% 득표율을 거두며 압승한 가운데, 나이절 패라지(한가운데) 브렉시트당 대표가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새로 선출된 유럽의회 의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지난 달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 브렉시트당이 창당 2개월 만에 31.5% 득표율을 거두며 압승한 가운데, 나이절 패라지(한가운데) 브렉시트당 대표가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새로 선출된 유럽의회 의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오바마 그 놈은 우리나라를 참지 못하는 혐오스러운 인간이다.”

2016년 11월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버락 오바마를 ‘그 놈’(That creature)이라고 부른 간 큰 정치인이 있었다. 영국의 브렉시트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반대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극언을 퍼부은 그는 최근에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패전국 항복 문서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민족주의와 반이민 정서, 반기득권 민심을 자극하는 과격한 언사는 ‘최소한’ 자기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브렉시트당은 31.5%가 넘는 득표율을 거두며, 양대 전통 정당 보수당(8.6%)과 노동당(14.0%)에 압승을 거뒀다. 영국 매체 익스프레스는 2일 측근을 인용해 패라지가 ‘브렉시트당이 양당제를 뭉개버릴 것’이라며 떵떵거렸다고 전했다.

중도ㆍ온건정치가 주춤한 사이 세계 곳곳에서 극우ㆍ극좌ㆍ포퓰리즘 정당이 부상하거나 도널드 트럼프(미국)ㆍ빅토르 오르반(헝가리) 등 극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이들이 집권하거나 득세한 여러 나라에서는 불안과 분열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홍민 위스콘신대 교수(정치학)는 “(포퓰리즘 정치가) 말과 선동으로 끝나느냐 아니면, 실천으로 이어지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위기. 주세페 콘테(가운데) 이탈리아 총리와 부총리 겸 노동산업장관인 루이지 디 마이오(왼쪽) ‘오성운동’ 대표, 부총리 겸 내무장관인 마테오 살비니(오른쪽) ‘동맹’ 대표가 지난 1월 로마의 총리궁인 팔라조 키지에서 연금제도 개혁과 관련한 내각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민주주의 위기. 주세페 콘테(가운데) 이탈리아 총리와 부총리 겸 노동산업장관인 루이지 디 마이오(왼쪽) ‘오성운동’ 대표, 부총리 겸 내무장관인 마테오 살비니(오른쪽) ‘동맹’ 대표가 지난 1월 로마의 총리궁인 팔라조 키지에서 연금제도 개혁과 관련한 내각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기득권을 규탄하고, 문제 해결을 호언장담을 하며 집권했지만 맥을 추지 못하는 대표 사례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극우 정당 ‘동맹’과 포퓰리즘 반체제 ‘오성운동’은 지난해 6월 1일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부를 출범시켰지만 이후 주도권 싸움과 노선 차이로 내부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연정은 저소득 실업자에 1인당 최대 780유로(약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등 선심성 복지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오히려 세금은 깎고 재정적자는 늘리는 정책을 펴 EU의 우려를 사고 있다. 내부 갈등으로 약속했던 정책들은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재정 부담을 마구잡이로 늘리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6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낸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취임 초부터 위태로운 상황이다. 지지율 하락을 면치 못하면서, 집권 첫 분기 말 기준 국정수행 지지율이 32%로 같은 시기의 전임 지우마 호세프(47%), 룰라(43%) 보다 10%포인트나 뒤진다. AP통신은 “연금 제도 개혁과 폭력ㆍ범죄 근절 등 핵심 현안대신 언론 때리기나 총기규제 완화 등 정치적 자원을 집중한 탓”이라고 꼬집었다.

민주주의. 지난달 23일 개표가 이뤄진 인도 총선 결과,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파 인도인민당(BJP)이 303석을 획득해 연방하원(543석)에서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모디 총리가 뉴델리의 BJP 선거 본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미소 짓고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민주주의. 지난달 23일 개표가 이뤄진 인도 총선 결과,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파 인도인민당(BJP)이 303석을 획득해 연방하원(543석)에서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모디 총리가 뉴델리의 BJP 선거 본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미소 짓고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강력한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앙숙 파키스탄과의 안보 갈등을 부각시키는 전략 등을 통해 지난 달 재집권에 성공했다. 지난 임기 동안 세제 개혁 등으로 경제면에서는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힌두 우선주의’ 탓에 종교ㆍ계층간 갈등이 불거지고 사회적 긴장이 악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함께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이 같은 적대 정치, 분열 정치가 ‘민주주의 제도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권력 분립을 명시한 잘 만든 헌법과 민주주의 제도가 있다고 한들, 상대 진영을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는 ‘상호 관용’과 강대강 대치를 피하기 위해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도 신중해야 한다는 ‘자제 규범’이 없으면 헌법도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타협하는 정치인’에 대한 미국 시민 선호도. 그래픽=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타협하는 정치인’에 대한 미국 시민 선호도.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러나 많은 정치인들은 표밭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다. 박홍민 교수는 “(미국 정치에서도) 양보와 타협은 배신으로 인식된다”고 진단한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에 따르면 카라반(중남미 이주민 행렬)과 국경 장벽 이슈로 뜨거웠던 지난 해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3%가 ‘고집을 꺾지 않는 정치인이 반대파와 타협하는 정치인보다 낫다’고 답했다. 전년도(2017년)만 해도 58%가 ‘타협하는 정치인이 낫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불과 1년 만에 뒤집힌 것이다. 특히 매년 공화당 지지층보다 ‘타협하는 정치인’에 대한 선호가 컸던 민주당 지지층에서 선호 응답 비율이 급감(69%→46%)한 것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분열과 편가르기 정치의 피해는 시민 사회에 전가되고 있다. 유혜영 뉴욕대 교수(정치학)는 “지지 정당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도 그대로 믿고, 다른 정당이 내놓은 정보는 전부 가짜뉴스라고 믿는 것”이 양극화의 중대한 폐해라고 꼽았다. 퓨리서치가 지난 해 미국 성인남녀 4,5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또 다른 조사에서 응답자 78%는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기초적 사실에도 공감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대안 없는 대안 세력이 여론을 분열 시키고 혼란을 키울수록, 시민 사회에서도 대화와 타협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 미국ㆍ유럽 등 서구 선진국부터 남미까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로 인해 대화와 타협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가 앓고 있습니다. 3회 연재로 전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과 대안을 모색합니다.

- 글 싣는 순서 <상> 밀려나는 주류세력 <중> 위태로운 극단세력 <하> 중도가 살아남는 법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홍윤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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