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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유람선 참사] “참 억척스레 버텨왔는데…” 독백으로 남은 실종 가이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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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유람선 참사] “참 억척스레 버텨왔는데…” 독백으로 남은 실종 가이드의 꿈

입력
2019.06.03 04:40
수정
2019.06.03 08:0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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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 목표 이루고… “한국의 길거리 음식 들여올 것” 못 다 이룬 또 하나의 꿈 

지난 1일(현지시간) 오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인근에 유람선 침몰 참사를 애도하는 촛불과 꽃들이 놓여 있다. 한국어로 쓰인 추모 메시지와 손으로 그린 태극기도 보인다. 부다페스트=김진욱기자
지난 1일(현지시간) 오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인근에 유람선 침몰 참사를 애도하는 촛불과 꽃들이 놓여 있다. 한국어로 쓰인 추모 메시지와 손으로 그린 태극기도 보인다. 부다페스트=김진욱기자


허블레아니호가 침몰한 지 5일째이지만 한국인 탑승객 19명은 아직까지 생사를 알 길이 없다. 여기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관광의 마지막인 다뉴브강 야경 일정을 리드하던 3년차 여성가이드 강모(36)씨도 포함돼 있다. 강씨와 함께 헝가리 현지에서 수년간 일한 동료 A씨는 2일 “하루가 멀다 하고 올랐던 다뉴브강의 유람선이 7초 만에 가라 앉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A씨와 현지 여행업계에 따르면 강씨가 처음 헝가리 땅을 밟은 건 2011년이다. 그에게 헝가리는 연고 하나 없는 ‘완벽한 타지’였다. ‘근교 도시에서 일할 한국인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 하나에 의지해 비행기로 꼬박 열 두 시간이 걸리는 먼 길을 날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강씨는 기념품가게 말단 직원으로 헝가리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생활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 6일씩 일하며 손에 쥔 돈은 생활비로 쓰기에도 빠듯했다. 그래도 억척스럽게 모았다. 다소 무리한 상사들의 지시도 묵묵히 견뎠다.

A씨는 “자주 가는 식당에 새로운 메뉴 하나 생긴 것도 크게 기뻐하는 친구였고 언제나 열심이었고 꾀 같은 건 전혀 몰랐어요”라고 강씨를 기억했다. 강씨에 대한 첫 인상은 “척 보기에도 절실함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씨는 20대 내내 호주에서 공부하며 정착을 꿈꿨지만 좌절한 경험이 있었다. 어렵게 유럽까지 건너온 강씨에겐 하루 빨리 뿌리를 내리는 게 간절했다. 라면 한 봉지 구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현지 사정은 열악했지만 끈질기게 버텼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에 진출했다. ‘언젠가 가이드로 일해보고 싶다’는 목표에 가까워졌다.

처음엔 도시생활이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여행업계에 텃세가 심한 탓도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대부분의 현지 가이드들은 끈끈한 인맥을 기반으로 알음알음 일을 받았다. 막 뛰어든 강씨는 어딜 가나 소외되기 일쑤였다. 단체 고객은 잘해야 일주일에 한번 남짓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틈새시장을 노렸다. 한인민박에 모이는 배낭여행객들을 상대로 근근이 ‘워킹 투어’를 뛰었다. 4, 5시간을 쉼 없이 걸으며 안내하는 일인데 돈은 턱없이 적었다. 그마저 겨울에는 뚝 끊겼다.

근근이 살아가는 와중에도 강씨는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서툰 헝가리어로 고군분투하면서도 헝가리 정부가 발행하는 공식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지에서 잔뼈가 굵은 가이드들에게도 어려운 시험이다. 부다페스트의 정세와 역사, 하다 못해 오래된 길 이름에 엮인 비화까지 갖은 정보를 깨알같이 공부한 결과였다. 억척 같은 다짐은 7년 전부터 그가 운영한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았다. “매일 카페에 가서 한 시간이라도 공부하기, 홀로 똑바로 중심잡고 살기.”

시간이 흐르자 그의 진정성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씨의 입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여행사에서 파견된 인솔자들이 직접 강씨를 가이드로 지명하기도 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에 유람선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의 깃발이 걸렸다. 부다페스트=김진욱 기자
지난 1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에 유람선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의 깃발이 걸렸다. 부다페스트=김진욱 기자

최근 몇 년 간 강씨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늘 시간에 쫓겨왔다고 한다. 일기처럼 적어 내린 블로그 게시글에선 고단함이 엿보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달에 고작 이틀밖에 못 쉬었다”는 푸념부터, “더는 버티기 힘들다. 모두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한탄도 적었다.

그래도 주변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줄 정도로 살뜰히 챙겼다. 동료들은 ‘맛있는 음식에 맥주 한잔 하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끼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씩씩함 이면에 짙게 깔려있던 외로움을 주변인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블로그엔 곁을 내주었던 친구나 지인이 하나 둘 헝가리를 떠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썼던 흔적들이 ‘독백’으로 남아있다.

“한국에는 있지만, 헝가리에는 없는 것을 사업화해보고 싶다고도 했어요. 붐비는 부다페스트 거리에 ‘길거리 음식문화’를 들여오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었고요. 이제 막 자리를 잡으면서 한 단계 나아갈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강씨 동료는 “머지 않았던 그의 꿈이 허망하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황급하게 날아온 강씨의 부모와 두 동생은 지금 기적을 바라며 하염없이 다뉴브강 수색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부다페스트=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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