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가장 치기 어려운 공은 타자가 미처 방망이를 휘두를 틈도 주지 않고 포수 미트로 빨려 들어가는 강속구다. 실제로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시속 150㎞ 중반의 강속구를 장착한 투수들이 즐비하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빠른 공 구속이 최소 140㎞ 중ㆍ후반은 나와야 ‘좋은 투수’로 분류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KBO리그에서는 최고 구속이 130㎞대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훌륭한 제구력과 날카로운 볼끝, 상대 타자와의 머리 싸움을 무기로 타자들을 제압하는 ‘느린 공 투수’들의 활약이 부쩍 눈에 띈다.
장민재(29ㆍ한화)는 지난 28일 대전구장에서 최근 상승세에 오른 KIA를 상대로 8이닝 동안 9탈삼진 무실점(3피안타)으로 ‘인생투’를 선보이며 시즌 6승째(1패)를 챙겼다. 지난 22일 대구 삼성전에서도 불펜 투수들의 난조로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6이닝 동안 2실점(5피안타) 호투하는 등 최근 4경기에서 3승을 올렸고, 평균자책점도 4.04로 리그 17위다. 눈에 띄는 부분은 장민재의 구속이다. 28일 경기에서 장민재의 빠른 공 평균 구속은 134.8㎞였다. 그러나 상대 타자들은 무릎 근처에 낮게 깔리는 직구에 배트도 내지 못하고 삼진을 당하는가 하면, 스트라이크존 근처로 오다 갑자기 떨어지는 포크볼에 속절없이 당했다. 장민재는 “모자챙 안쪽에 ‘제구력이 살길이다’라고 적어놓고 마음을 다잡는다”면서 “속구형 투수가 아님을 인정하고 제구력에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오주원(34ㆍ키움)도 평균자책점 1.83으로 완벽투를 선보이고 있다. 경기 중반 1이닝 안팎을 책임지지만, 최근 15경기에서 실점(자책점)한 경기는 단 한 경기뿐이다. 오주원의 빠른 공 구속도 133~138㎞에 불과하다. ‘느림의 미학’으로 정평 난 유희관(33ㆍ두산) 역시 올해 128~133㎞대 직구와 100㎞ 안팎의 느린 커브를 앞세워 평균자책점 8위(2.91)에 자리잡았다. 특히 최근 4경기(30이닝)에서 내준 실점은 3점, 볼넷은 단 2개에 불과할 정도로 정교한 제구력을 뽐내고 있다. 또, 박종훈(28ㆍSK)과 박진우(29ㆍNC), 윤성환(38ㆍ삼성)도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리그 상위권에 포진했다. 이들 모두 직구 구속이 130㎞ 초중반의 ‘기교파’다.
역시 제구력이 가장 큰 관건이다. 안경현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기교파 투수들은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게 아니라,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에 던진다”면서 “타자들은 배트를 낼지 말지 망설이다가 서서 당하거나 치더라도 범타로 물러나기 일쑤다. 이런 공들은 느려도 치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공 회전력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기교파 투수들은 더 돋보인다. 홈플레이트 근처에서의 날카로운 공 움직임과 볼 끝으로 빗맞은 타구를 유도해 낸다는 것이다. 장성호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공의 회전력이 좋으면 실투를 하더라도 파울이 될 확률이 높다”면서 “윤성환의 경우 예년보다 확실히 회전력이 좋아졌다”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올 시즌부터 반발력을 낮춘 공인구와 좌우로 넓어진 스트라이크존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안경현 위원은 “공인구가 바뀌면서 공이 멀리 뻗지 못한다”면서 “또 스트라이크존이 넓어지면 당연히 좌우 활용 폭이 넓어져 제구가 좋은 투수들에게 유리하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유능한 포수의 공 배합 △상대방의 타이밍을 뺏는 투구폼 △타자를 상대하는 노하우 등도 기교파 투수들의 무기다.
다만 ‘느린 공은 양날의 검’일 수 있다. 장성호 위원은 “최근 타자들의 힘이 많이 좋아진 만큼 제구가 완벽하게 되지 않으면 느린 공은 난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과거에는 방수원(해태)이 140㎞에도 못 미치는 공으로 KBO리그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OB)도 노히트노런 포함, 통산 109승을 올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주소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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