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 2016년 발표한 글을 다른 작가가 대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문단의 윤리 의식이 또 다시 도마에 올랐다.
대필 사건의 주인공은 김경주(43) 시인과 차현지(32) 작가다. 2003년 등단한 김 시인은 베스트셀러 시집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 등을 냈으며, 2009년 김수영문학상과 오늘의젊은예술가상을 받았다. 차 작가는 2011년 소설로 등단했다. 두 사람은 김 시인이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를 맡은 2010년 교수와 학생으로 만났다.
문제의 글은 2016년 미디어아티스트 흑표범의 전시 도록에 김 시인 이름으로 실린 ‘서쪽 건너에 비치는 환시’라는 제목의 비평이다. 차 작가가 대필한 글이었다는 것이 3년 만에 알려진 사연은 이렇다. 차 작가는 지난 4월 대필 전력을 고백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누구의 글을 대필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김 시인은 이달 초 흑표범에게 갑자기 연락해 대필 사실을 고백했고, 흑표범은 사실 확인 끝에 지난 2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도록 글의 필자명을 (김경주에서 차현지로) 정정한다”고 알렸다.
김 시인은 대필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그는 29일 한국일보에 보낸 입장문에서 “2016년 흑표범 작가에게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작가로서 부담이 됐다”며 “평소 미술 평론에 관심이 많던 차 작가가 본인이 써보고 싶다고 했고, 합의 하에 차 작가가 원고를 작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시인 은 이어 “세금을 제외한 원고료 전액에 제 돈을 보태 차 작가에게 보냈다”면서 “차 작가와 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께 결정한 일로, 강요에 의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겁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차 작가는 자신이 먼저 대필 제안을 했다는 김 시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한국일보와 전화통화에서 “김 시인이 먼저 대필 제안을 해왔다”며 “당시 저는 작가적 자의식이 없는 신인이었던 데다 글을 쓸 기회가 너무나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또 “대필을 제안하고 수락하는 관계는 결코 수평적인 관계일 수 없다”며 “다른 신인 작가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대필 사실을 밝히게 됐다”고 말했다.
누가 대필을 제안했든, 뒤늦게 대필을 고백한 사정이 무엇이든, 김 시인과 차 작가 모두 문인의 윤리를 저버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5년 표절 시비로 문단을 떠났던 신경숙 작가가 최근 창작과비평이라는 문단 권력을 업고 전격 복귀한 데 이어, 문단의 구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무성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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