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3>정의를 깨운 판사 이탄희
“국민의 슬픈 믿음을 배신한 사법농단 판사들, 내려와야”
공익변호사로 새 출발 “이런 경험 하고 판사 했더라면…”
공익 변호사가 된 이탄희 전 판사를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에서 만났다. 이날은 그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으로 출근한 지 26일째였다. 배우한 기자

“이탄희 변호사님 만나러 왔는데요” 소리에 다닥다닥 붙은 책상 어느 칸에서 그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약속시간보다 20분 이른 출현에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사무실에서 막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해결한 모양이었다. 이내 그는 배시시 웃으며 “편하게 입었는데 괜찮나요” 물었다. 깃 없는 반팔 면 티셔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로 옆에 놓인 선풍기가 이유를 말했다. 회의실 말고는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었다(그런데 인터뷰 이후인 6월 4일 이 전 판사가 연락을 해왔다. “에어컨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4년 된 것이 있긴 하나 전기요금 등을 고려해 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마 판사 시절에는 시도하기 어려운 출근 복장, 그때보다 열악한 환경일 것이다. 그래도 그의 미소에는 홀가분함 같은 게 묻어 있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변호사로 출근한 지 26일째, 사법농단의 최초 저항자 이탄희(41ㆍ사법연수원 34기) 전 판사다.

법조인 대부분이 그렇듯 그도 모범생이었다. 큰 시련 없이, 일탈 없이,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연수원 성적이 100등 안이면 판사, 200등 안이면 검사’라는데, 그는 판사로 임용됐다.

법관이 돼서도 책상이 아니라 법정에 충실하고 현장을 중시했다. 지방변호사회가 해마다 평가하는 우수법관으로 세 번(2012년, 2013년, 2015년)이나 선정됐다. ‘교과서 같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걸까.

아마 그래서 가능했을 거다. 주류법관 양성소이자 승진 코스로 여겨졌던 법원행정처의 기획조정실로 발령 받고 직면한 법원의 적폐에 몸을 담그지 않았으니 말이다. 기조실 PC에 암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고, 이를 관리하는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 심지어 자신이 속해있는 판사들의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 시키는 업무도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서다. 일주일 만에 사표를 제출하게 한 동력은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한 전임자들이었다. “저게 내 미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여곡절 끝에 사표를 철회했고, 그는 법원행정처 발령 전의 근무처인 수원지법 안양지원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됐고, 지금 우리가 아는 사법농단의 실체도 드러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올해 2월 진짜 사직했다.

그는 사법농단을 ‘배신’이라고 표현했다. “국민은 판사들을 믿었죠. 그 믿음은 슬픈 믿음이에요. 필요에 의한, 저 판사는 내 진실을 밝혀 주리라는, 그래서 슬픈 믿음이죠. 그 믿음을 배신했으니 엄중한 일이에요.”

교과서 같은 얘기는 교과서에만 박제돼 있으라고 적어두는 게 아닌데 말이다. 이 모범 율사는 말했다. “명예를 지키고 싶었어요. 그 명예는 내가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려있죠. 괴리가 커진다면 당당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면 확신을 갖지 못해요. 결단력은 거기서 나오죠. 그게 판사의 자격이에요.”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가 분리된다면, 그 칼날은 세상을 망치거나 자신을 망치게 될 거다. 홀가분한 그 미소의 비결을 알았다.

◇본인은 법관으로서
이탄희 전 판사는 으레 전관들이 큰 부를 쌓을 수 있는 대형 로펌에 가는 것과 달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를 돕는 공익 변호사를 택했다. 그가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에 있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자기 자리에 앉아있다. 배우한 기자
-판사 때와 비교하면 일과가 어때요?

“많이 바뀌었죠. 여기(공감)는 출근시간이 오전 10시라서 아이들 학교 가는 걸 보고 나올 수 있어 좋지만, 퇴근이 아주 늦죠. 근태 관리도 공무원보다 더 엄격한 것 같아요. (웃음) 하루 일과를 서로 공유해요. 현장에 나갈 일도 많고요. 업무 강도가 만만치 않아요. 법원에 있을 때는 사실 출, 퇴근 시간이 큰 의미가 없었죠. 어차피 초과근무를 하니 그렇기도 하고 재판 시간만 지키면 나머지는 판결문 쓰는 데 적절하게 배분해 쓰면 되니까요.”

그는 사흘 전인 24일 첫 현장에 다녀온 터였다.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들을 만났다. 다음날엔 쪽방촌 실태를 점검했다. 그가 공감에서 맡은 분야는 빈곤과 복지다.

-판사들은 현장에 나갈 일이 별로 없나요?

“거의 나갈 일이 없죠. 법률용어로 현장검증이라는 제도가 있긴 한데, 당사자가 현장검증을 신청하면 철회하도록 유도하는 판사도 있죠. 시간을 많이 잡아먹거든요.”

-판사도 할당된 재판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가요?

“업무량이 굉장히 많긴 해요. 그러나 나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아요. 열심히 하는 판사들은 그 와중에도 나가려고 노력하죠. 현장을 보고 싶으니 현장검증 신청을 하라고 권유하는 판사도 있어요. 저도 현장에 많이 나가려고 했고요.”

-왜 현장에 가보려고 했나요?

“그래야 사건에 더 확신을 갖고 결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이해관계인들과 충분히 얘기하면 재판에 도움이 많이 돼요. 중재안을 낼 수 있는 경우도 있고요. 당사자들 간에 그렇게 합의가 되면 분쟁이 종결되니 재판을 계속해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낫죠.”

-그렇군요.

“재판이 어려운 이유는,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두 개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둘 다 쉽게 양보하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게 판결이죠. 그래서 굉장한 확신이 필요한 일이에요.”

-어떤 경험을 지닌 사람이 판사가 되느냐 하는 것도 참 중요하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현재 법관 임용 시스템은 사실상 대법원장이 결정하는 구조예요. 법관인사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지만 상설기구가 아니에요. 실무는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는 법원행정처에서 다 하지요. 어떤 사람들이 판사가 되는지가 대법원장의 의사 결정 하에 놓여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대법원장이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법조인이 판사가 되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임기 6년 동안 시민단체 활동 경력이 있는 신입판사가 한 명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죠. 더 무서운 건 그런데도 외부에선 모르죠. 그래서 법관 임용이 좀더 개방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바뀌어야 해요.”

진중한 얘기인데,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선한 인상이라는 말 많이 듣지 않았나요?

“그런가요? 하하.”

-모범생에다 일탈이라고는 안 해봤을 것 같아요.

“모범생이었죠. 혼자 하는 일탈은 해본 적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 귀여운 일탈은 몇 개 있었죠. 하하.”

-법대에 진학한 것도 성적이 좋아서였나요?

“그렇죠. 제가 원래 수학을 잘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고 하니까 주위에서 이과 가라고 그랬죠. 그래서 수학을 더 열심히 했고요. 어느새 꿈이 과학자가 됐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수학공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진로가 바뀌었어요. 특별한 이유 없이 성적대로 법대에 갔고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는 “처음에는 왜 판사가 됐는지 잘 모르겠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상은 결핍에서 온다’는 말처럼, 그래서 더욱 몰입해 일하며 이상을 세웠고, 그것을 채우려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배우한 기자

3학년 때인 1999년 여름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해 2002년 2차 시험까지 합격했으니 이 과정 또한 참 순탄했다. 2003년 34기로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1년차, 강금실 법무부장관 때였다.

-연수원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했나요?

“처음에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들어가자 마자 아내(오지원 변호사)를 만났거든요. 주로 연애에 관심이 많았죠. (웃음)”

-그때 사법연수생들이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낸 사건이 있었죠?

“맞아요. 그게 저한테는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에요. 미국이 이라크를 공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고 국제법적으로 논란이 많았죠. 당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illegal(불법적인)’이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비판했고요.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1차 파병은 그나마 비전투병을 보냈지만, 이어 미국은 전투병으로 명시해 추가 파병을 요구했죠. 반대 여론의 핵심은 국제 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 5조 1항 위반이라는 거였어요. 찬성론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라는 세속적 측면이 컸고요.”

당시 의견서는 그가 썼다. 예상과 달리 33기(2년차)와 34기(1년차) 연수생 1,900명 중 561명이 서명했다. 특히 동기인 34기는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동참했다. 연수생들이 논란이 뜨거운 사회 현안에 의견을 표출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어떤 생각이었나요?

“예비 법조인이니까 파병의 법적인 쟁점에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 공화국’을 표방했고, 청와대 국민참여수석실을 통해서 사회 각계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했죠. 예비 법조인으로서 국민참여수석실에 파병 여부를 헌법에 비춰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게 특별한 돌출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시 강금실 장관도 실질적 법치주의를 강조하면서 헌법적 가치를 강조했고요.”

하지만 결과는 징계였다. 감봉 3개월 1명을 포함해 서면ㆍ구두 경고까지 모두 19명을 징계했다. 국가공무원법 57조(복종의 의무)와 66조(집단행위 금지)를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도 서면 경고를 받았다.

-사법연수원 생활은 실무를 익히는 의미도 있는데, 사회 현안을 헌법적 측면에서 들여다 보고 의견서를 냈다고 징계하는 게 잘 이해되지 않네요.

“지금도 당위적 측면이나 실정법적 측면 모두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의견 표시를 한 것이지 집회나 파업 같은 물리적 행동을 한 게 아니거든요. 2013년에도 사법연수생(43기)들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당시 검찰총장에게 낸 사건이 있었지만, 그때는 징계하지 않았죠.”

-그 일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설명하기 힘든 분한 마음이 들었어요. 지기 싫다,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 기본적으로 저도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세속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나의 가치에 상처가 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열심히 공부하는 자신을 발견했죠.”

-판사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큰 고민을 했다기보다, 판사에 임관되는 성적을 갖고 싶었다는 마음의 연장선이었죠.”

2008년 4월 1일, 그는 서른 살에 판사 선서를 했다.

-선서할 때 어땠어요?

“다른 건 잘 기억 안 나는데, 임관식에 왔던 법원행정처 차장의 말은 생각나요. 인사심의관을 뒤에 데리고 다니면서 신임 법관과 부모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제 순서 때 뒤에 심의관에게 저를 소개하면서 ‘얘 특전사 출신이니 요원으로 잘 키워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로부터 9년 뒤에 이런 (사법농단) 사건이 터졌고, 행정처 심의관이 그 ‘요원’이었다는 게 드러났으니…….”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요원’이라는 말이 일종의 은어였을까요?

“우연히 그 말이 나왔을 수도 있죠. 하지만 요원의 덕목은 판사의 덕목과는 정반대니까, 이상하긴 했어요. 판사는 독립적이어야 하죠. 하지만 요원은 종속적이고 자기 생각을 철저히 죽여야 하잖아요.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도구로 만들어야 하니까.”

-판사로 일하면서는 어땠나요?

“내가 판사로서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예를 들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취임사나 퇴임사를 보면 올곧은 얘기는 다 있어요. ‘투명하게 드러나는 재판’,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떠한 형식의 부당한 영향도 받지 않도록’, ‘정치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같은 말이죠. 그런데 하는 말과 실제 자신의 모습이 일치해야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일치하느냐가 판사로서 자격이 있느냐의 답이라고 생각해요. 명예라는 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외적인 것뿐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내적인 면도 있는 거니까요. 외부에서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게 괴리가 커지면 사람이 강해지기 어렵죠.”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됐지만, 운 좋게도 그는 판사로서 확신을 갖게 하는 좋은 스승을 만났다. 배석판사로 처음 재판부에 배치돼 만난 부장판사였다.

“정말 재판을 잘 하고 좋아하는 분이었어요. 첫 재판하러 들어가는 날 저를 부르더니 법복을 입혀주셨죠. 뒤에선 다른 배석판사들이 지켜보고요. 엄숙하고 숭고한 느낌이었어요. 그런 경험이 있는 판사가 많지는 않더군요.”

-재판을 잘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변호사들이 서면을 내거나 말을 하면 그걸 요약해서 다시 자기의 언어로 설명을 했어요. 내가 이렇게 이해했는데 맞느냐는 의미죠. 그럼 변호사나 당사자가 거기에 또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듣고, 받아 적고, 또 자기 의견을 얘기하고요. 그렇게 법정에서 소통을 열심히 하는 분이었어요. 선고 기일을 잡으면서도 그때까지 못다한 얘기가 있으면 또 써서 제출하라고 당부도 하고요. 그러니 판결이 예측이 되죠. 또 왜 그렇게 판결이 나오는지 당사자들이 이해를 하고요. 항소를 하더라도 어떤 부분을 다시 다투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있죠. 옆에서 보면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도 정말 몰입해서 열심히 일했어요.”

그의 첫 부장판사는 사법농단에 사직서로 저항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도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말로 그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양심에 따라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발령 이후 직면한 사법 적폐에 사직으로 저항했지만 그 전까지 그는 변변한 일탈 한 번 해본 적 없는 ‘모범생’이었다. 배우한 기자
-2017년 2월 법원행정처로 발령이 나기 전까지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네요.

“그렇죠. 변곡점은 있었지만요.”

-뭔가요?

“2014년에 하버드 로스쿨로 연수를 가서 이듬해 여름에 돌아왔는데, 법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더군요. 열정이나 이상이 잘 느껴지지 않았어요. 서서히 바뀐 것이겠지만. 1년 동안 유학생활은 즐겁고 활기찼는데 귀국해보니 대비되는 느낌이 대단히 컸죠. 따뜻하게 데워진 컵이 갑자기 찬 공기 속에 내던져진 것 같았어요. 친한 후배 판사를 만나서 술을 마시는데 그러는 거예요. ‘요즘은 재판 잘한다고 잘 되는 시대 아니다. 회식자리에 늦게까지 있어야 하고, 체육대회도 열심히 나가야 하고, 그래서 좋은 평정을 받으면 기획법관도, 심의관도 될 수 있고 고법부장도 할 수 있는 거다. 형도 대법관 해야 하지 않겠냐.’ 속이 쓰렸죠.”

그러다가 2017년 2월 그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발령 받으면서 모든 사건이 시작된 거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행정조직인데, 언제부터 판사들이 가게 된 건가요?

“지금처럼 대규모로 투입하게 된 건 1975년 법원조직법이 개정되면서 법원행정처 구성을 대법원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바뀌면서죠. 그 전인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육군대령, 검사 출신, 법무부 차관을 법원행정처장으로 보냈어요. 법원행정처를 통해서 판사들을 통제하려 했던 거죠. 행정업무뿐 아니라 인사나 예산 권한이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법원행정처장은 대법관이 되길 원하니까 전두환 정권이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일이 벌어졌죠. 우리나라는 그래서 대법원장을 포함해서 최고법원의 재판관이 14명으로 짝수예요. 전원합의체로 판결할 때는 홀수여야 다수, 소수가 갈리잖아요. 그런데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을 안 하니까, 실제 재판은 홀수로 하는 기이한 형태죠.”

참여정부 때인 2005년에는 다시 법원행정처장에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을 임명해 법원의 사법행정조직과 재판조직을 분리하는 시도를 했지만, 2년 만에 돌아갔다. 국회의 요구로 대법원장이 대법관 중에서 법원행정처장을 임명하도록 법이 개정된 것이다.

-법원행정처에는 판사가 얼마나 있나요?

“30여명 정도 돼요.”

-위세가 점점 막강해져서 승진 코스가 된 거군요.

“수십 년 문제가 누적돼 그렇게 된 거죠. 단순히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 때 그의 잘못된 철학으로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라 그간 쌓인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거예요.”

-이것도 독재 시절의 적폐 중 하나네요.

“그렇죠. 구조적 적폐죠.”

-그럼 청산해야 하지 않나요?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없애겠다고 했죠. 법원사무처로 바꾸고 탈(脫)판사화를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물건으로 따지면 법원사무처로 바꾸는 건 포장지를, 탈판사는 내용물을 바꾸겠다는 뜻이죠. 내용을 바꾸는 게 훨씬 중요해요. 그런데 작년 말에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에 낸 사법행정제도 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 의견서를 보면, 탈판사화는 빠졌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뿐인 개혁 아니냐고 걱정하고 있죠. 잘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쉽게 놓지 못하는 걸까요?

“권력이기 때문이겠죠. 생각해보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 판사들이 없었다면 재판 개입이 어렵거든요. 예를 들어서, (드러난 재판거래 정황을 보면) 국회의원이 국회 파견 판사를 통해서 일선 법원에 연락을 했잖아요. 그런데 판사가 아니라 직원이었다면 일선 법원 판사한테 전화를 못했을 거예요. 했다고 하더라도 판사가 듣지도 않고 끊었겠죠. 판사였기 때문에 전화도 할 수 있고 의견도 전할 수 있었던 거죠. 판사들 사이에 있는 선민의식, 동류의식 때문이에요.”

◇공정하게 심판하고
그의 얼굴과 팔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법원을 나온 이후 40일 간 머문 스페인의 태양이 남긴 흔적이다. 그는 “여러 순간과 감정들을 편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처음 행정처 발령 받고 나서는 좋아했나요?

“축하를 엄청 많이 받았어요. 한편으로는 저어되는 느낌도 있었고요. 2017년 2월 9일에 발령을 받았는데, 1월에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한테서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거든요. 그 전화를 받기 전에는 저를 심의관으로 추천했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기분이 나빴죠. 그런데 실제 발령이 나니까, 그런 꺼려지는 감정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축하전화가 너무 많이 오더라고요. 선발되는 보직에 가서 주목 받는 느낌이랄까요. ‘네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심에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분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그 저어되는 감정은 잠시 밀쳐두고 일단 어떻든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열심히 해보기로 했으니, 그는 일단 법원행정처의 전ㆍ현직 심의관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들은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이미 보도됐듯,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방에 근무하는 옆 책상 판사한테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떤 비밀인지 구체적으로 말은 않던가요?

“네, 그들이 내가 잘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10년 가까이 친분을 쌓아온 이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않다가 갑자기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죠. 법원행정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일선 판사들에게 비밀로 해야 할 정도의 일이라면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행정처에 출근해보니 어땠나요?

“저를 심의관으로 추천했다는 고위 간부도 만나고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도 받았어요.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PC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는데 그걸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었죠. 또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기로 정책적 결정이 됐고, 그와 관련한 반발을 무마하는 일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단계적으로 로드맵까지 만들어뒀더군요.”

-그게 며칠 동안의 일인가요?

“2월 9일자로 발령 받아 16일에 사직서를 냈으니까 일주일간이죠. 의구심을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확실하지 않은 이상은 내 일을 열심히 하는 방향으로 결론 내려고 노력을 해왔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물러설 수 없는 선에 부딪힌 거죠.”

-뭐였나요?

“제가 (사직) 결정을 빨리 하게 된 동기가 (결정적으로는) 전임자에게서, 전임자의 전임자 얘기를 듣고서였어요. 대학 때 선배였고, 저한테 평소에 잘해주는 분이었죠. 평판도 좋았고요. 그런데 그 선배가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더 열심히 한다는 거였어요. 나중에 진상조사 결과를 보면, 법원행정처와 대립적 관계에 있던 판사들에게도 신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서 얻은 정보도 많이 보고를 했더군요. 저게 내 미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빨리 결정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뒷조사란 게 뭔가요?

“당시는 저는 파일을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어요. 나중에 드러난 걸 보고 나서는, 생각보다 너무 구체적이어서 놀랐죠. 예를 들면, 보고서 중에 2017년 1월에 국제인권법연구회 운영위원회에서 어떤 발언이 오고 갔는지 기재한 것도 있었어요.”

-속기록을 남기는 회의인가요?

“전혀 안 남기죠. 그냥 판사들의 사적인 자리랑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당시 모임 장소도 호프집이었고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대화가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더라고요.”

-국제인권법연구회는 학술모임인데, 와해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무슨 이적단체도 아니고요.

“나중에 드러난 양 전 대법원장 발언 같은 걸 보면 비슷한 심리적 태도를 읽을 수 있더라고요. 아마 바른소리 내는 판사들에게 혐오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판사들이 점점 국제인권법연구회로 모여들고 있다고 생각했겠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이 29일 첫 공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 수뇌부 외에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법관 66명 중에서 대법원은 10명만을 징계 청구했다. 면죄부를 받은 나머지 판사들이 누구인지 국민은 명단조차 알 수 없다. 연합뉴스
-판사는 독립된 헌법기관인데, 그런 재판 거래 같은 사법농단을 집행했다는 게 놀라워요.

“대법원장이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수십 명의 판사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말리지 못하고 오히려 적극 조응해서, 대법원장이 원하는 성과를 내려고 노력했다는 것, 그게 심각한 일이죠. 가슴이 아파요.”

-전임자 중에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가요?

“없었으니까 저를 인터뷰 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하하.”

-게다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었잖아요. 그런 판사에게도 시키면 다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양 전 대법원장이나 당시 법원행정처가 점점 오만해졌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어떤 사람들이 와도 시키면 다 하는구나, 오히려 더 잘하는구나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죠.”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건 스스로 법관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일인데요.

“자기 권위를 스스로 깎는 거죠. 외적 명예와 내적 명예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마 외적인 권위가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몰래 하는 거지. 법원행정처가 판사들한테 이런 통제력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잖아요. 그러니까 외부적으로는 여전히 판사들이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독립돼서 양심적으로 재판하는 모양새가 유지됐다고 여겼을 수도요.”

뿐만이 아니라 양 전 대법원장이 만든 한마음체육대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려졌다. 전국의 법관과 법원 직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관중석을 채운 후 양 대법원장이 등장하면 판사와 직원들이 카드섹션을 하고, 노래를 개사해 ‘양비어천가’도 불렀으며, 남성 판사가 웨이터 복장을 하고, 여성판사가 세일러문 코스프레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판사 뒷조사 파일이나 재판 개입도 큰 문제지만 체육대회에서 판사들이 했다는 일은 정말 치욕적이죠.

“당시 체육대회에 다녀온 판사들이 ‘가서 내가 뭘 했는지 묻지 마라’면서 괴로워했던 적이 있어요. 본인들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을 거예요. 뒷조사 같은 건 몇몇이 입을 다물면 비밀이 지켜질 수 있다고 쳐도, 체육대회는 대낮에 전국에서 판사와 직원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인데,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행동을 서로 지켜보면서 했다는 게 참 비참하죠. 그래서 제가 사법개혁 방안으로 투명성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전제조건은 우리 법원의 극단적 폐쇄성 때문이죠.”

-첫 사표를 쓴 이유로 명예를 지키고 싶었다는 말을 했었죠. 명예를 지키는 방법에는 남아서 투쟁을 하는 방안도 있는데 왜 사직을 택했나요?

“나의 명예를, 세계관을, 내가 생각하는 판사의 이상을, 나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그러려면 사직서를 내야 했죠.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법원행정처에 안에서는 자신을 지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렇죠.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같은 건 대법원 차원에서 결정돼서 바꿀 수 없는 일이었어요. 대법원장의 결정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요. 그냥 따를 수밖에 없죠.”

그런데 사즉생 생즉사인 건지, 결국 그는 남게 됐고 사법농단의 진상을 드러내 개혁의 시초를 마련했다.

-결국 남아서 바꾼 결과로 이어졌는데요.

“사직서를 철회했고 그게 보도되면서 이렇게 됐죠. 그런데 처음 낼 때보다 철회할 때 오히려 고민이 많았어요. 철회하고 돌아간다면 그 다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법원행정처에서는) 이틀 동안 저를 전방위적으로 설득을 했죠. 결국은 사직서를 철회했는데, 그 순간에는 약간은 판사직을 갖고 싶은 미련 같은 게 작용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또 오래 걸리겠지만 진상이 밝혀질 것이고 그때까지 나는 버텨야 한다는 생각도 했죠.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어요. (사직서를 철회하고 겸임 해제가 돼 행정처 발령 전의 근무지인 안양지원으로) 돌아가고 20일 만에 언론 보도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으니까요.”

-두 번째 사직서 내기까지는 어떻게 지냈나요?

“힘들었어요. 저는 진실을 밝힌다는 마음으로 사직서를 낸 게 아니었잖아요. 근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서서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흘러갔어요. 2년 동안 제가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재판을 할 때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을 잘 하면 법정에서 진실이 드러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법정 밖의 세상에서는 진실이 드러나는 걸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제가 판사로서 10년 동안 일하며 몸에 밴 행동 습성하고는 다른 거였죠. 판사는 어쨌든 본업은 심판이거든요. 그런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는 일은 선수가 된 느낌이었죠. 그러면서도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고요. 어쨌든 나로 인해서 촉발된 일이니 미래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니 그 싸움을 포기할 수도, 질 수도 없으니, 계속 하긴 하는데 하면 할수록 점점 나는 심판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고 이대로 계속 가면 법원에 있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업보다 오히려 그 일이 날 더 무겁게 눌렀죠. 그게 내가 생각하는 판사로서 덕목과 충돌했고, 점점 돌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졌어요. 그래서 사직한 거죠.”

-후회하진 않나요?

“어떤 후회도 없어요.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제 명예를 지켰잖아요.”

-사직할 때 부인과도 상의 했나요?

“주저하지 않고 사표 내라고 하더군요. 2년을 옆에서 지켜봤으니까요.”

-이런 일로 판사를 그만두게 될 줄 몰랐겠죠.

“전혀 상상도 못했죠. 저는 계속 법관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판사의 정의(正義)는 강자를 처단히고, 약자를 북돋워주고, 이런 게 아니라 보편적 진실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은 법정의 판사석에 앉아 진실을 선언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진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의 대법정을 내려다 보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의(正義)란 과연 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판사가 추구하는 정의는 진실이에요. 그건 보편적인 진실이죠. 팩트가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 그리고 드러난 사실에 보편타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판사 시절 선고할 때 어떤 생각으로 했나요?

“내 전인격을 여기에 건다. 내가 선언하는 거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양보하지 않는 두 주장을 놓고 내가 생각하는 진실을 선언하는 권한을 가진 게 판사니까요. 그 선언을 할 때는 내 전인격을 거는 거죠. 그리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거죠. 그래서 판사의 자격이 중요한 거고요.”

그가 잠시 뒤 덧붙였다.

“지금 법대(法臺ㆍ법정에서 판사들이 앉는 곳)에 앉아있는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도 그 초심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무엇이 진실인지 선언할 자격이 여전히 있는지, 법관이란 자리를 자기의 사적 신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말이죠. 그 공적인 역할을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아니라면 욕심 부리지 말고 내려놓아야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법농단으로 판결에 부당한 힘이 개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국민 입장에선 (사법농단이) 배신이죠. 믿었으니 배신감이 드는 거잖아요. 그 믿음이란 건 슬픈 믿음이거든요. 필요에 의한 믿음. 결국은 저 판사는 진실을 밝혀주리라고 믿는 거죠. 굉장히 슬픈 믿음이에요. 그걸 배신하면 사람들한테 원한을 심어주는 거예요.”

-평소 궁금한 게 있었어요. 판결문은 왜 그렇게 어렵고 끝도 없는 만연체인가요?

“그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사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항소심 재판부에 보이기 위한 것이라서 그래요. 지금까지는 우리나라 법원은 마치 관료조직처럼 운영돼 왔거든요. 내부에서 계속 승진하는 시스템이란 거죠. 그렇다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니 항소심 재판부를 신경 쓰게 되는 거죠. 국민한테 재판 잘하는 판사라고 인정 받고 존경 받는 법조인이 판사가 되고 대법관이 된다면 판결문도 쉽게 쓰겠죠.”

-전관은 인기가 많잖아요. 올해 초 사직했을 때 대형 로펌에서 영입 제의는 없었나요?

“몇 군데서 감사하게도 저를 걱정하면서 제안해주기도 했죠. 그런데 그렇게 크고 좋은 곳에 가서 일을 해서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았어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공익법재단 공감은 그가 아내 오지원 변호사와 함께 10년 넘게 후원해온 곳이기도 하다. 공감은 올해 창립 15주년이다. 배우한 기자

그래서 택한 길이 공익변호사다.

-공익변호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요?

“사회의 공적인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소송을 하죠. 차별 받고 고통 받는 약자나 소수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필요한 법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요. 사법개혁 관련 활동도 해왔고요.”

그가 속한 공감에는 11명의 변호사가 활동한다. 판사 출신은 그가 유일하다. 공감은 당사자한테 수임료를 받지 않고 기부와 후원만으로 운영된다.

-이틀 전에 처음 현장에 다녀왔다고요. 어땠나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서울역 주변에만 노숙인이 200명 정도 있는데, 너무 깡말라서 뼈만 남은 분도 있었죠. 말하기조차 힘들어 했어요. 지난주까지 수유리 쪽방에서 살다가 월세가 밀려 쫓겨났다고 하더군요. 바로 앞에 있는 의료시설로 안내 해드려도 가고 싶지 않아 했어요. 물에 가라앉고 있는 사람을 본 거 같아서 속상했어요. 재판을 10년 넘게 했는데 이런 경험을 먼저 하고 판사가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 재판의 의미를 더 잘 알았을 것 같아요. 법정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 때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겠죠. 판사 할 때도 현장을 중시했고, 법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하려고 노력은 해왔는데 그래도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사람들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건 전엔 몰랐거든요.”

경력을 쌓은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선발하는 법조일원화가 단계적으로 시행돼 2026년부터 10년 이상 법조 경력자만 법관에 선발될 수 있지만, 벌써부터 이를 흔드는 목소리가 많은 게 사실이다.

“법조일원화가 완전히 시행되면 어떤 사람들이 판사로 임용되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져요. 다양한 사회적 경험과 직업적 체험을 한 사람들이 골고루 판사가 돼서 법관 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때로는 갈등을 하고, 타협하면서 세상의 다양성이 법원 안에도 반영되기를 바라요.”

-수입은 적어졌나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졌죠. 하지만 판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공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일을 여전히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은 뒤 생각해보니, 둘 중 하나더라고요. 단체에 들어가든지, 혼자 새로운 일을 모색하든지. 혼자 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공감은 10여 년 전부터 후원해왔기 때문에, 워낙 친숙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생각이 났죠.”

-공익 변호사가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면요.

“사회적 약자, 소수자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잖아요. 수임료를 지출할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들도 법의 보호를 받을 방법이 있어야죠.”

공익을 위하는 변호사가 오히려 경제적인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고, 유명 로펌이 아니라 공익변호사의 길을 택하는 판사나 검사 출신도 많아져야 우리 생태계가 건강하게 돌아갈 텐데 말이다.

-전관은 돈 많이 주는 대형 로펌에 갈 기회가 많잖아요. 전관예우 때문에.

“전관이라고 불리는 변호사들이 만들어낸 편견이죠. 그래서 우리 재판의 지독한 불투명성을 개선해야 해요. 우리는 재판이 법정에서 이뤄지고 법정에서 결론에 다가간다기보다 법정에서는 주로 서면이 제출되고 결론은 판사의 사무실 안에서 나는 구조죠.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획기적으로 개선됐다고 보지 않아요. 그러니 전관예우라는 말이 횡행하죠. 어떤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지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 전관이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파고들 틈이 생기는 거죠. 재판 기록 방식도 바꿔야 해요. 지금은 법정에서 판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록하지 않아요.”

-그럼 어느 정도로 기록하나요?

“예를 들면, 판사가 진술거부권을 고지한다고 쳐요. ‘당신은 형사상 불리할 수 있는 내용의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고 간단히 말하는 판사도 있을 수 있고 훨씬 길게 설명하는 판사가 있을 수도 있는데 둘 다 ‘진술거부권 고지함’ 이렇게만 기록하죠. 중계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녹음 같은 기록을 해두면, 판사 스스로도 재판 과정을 복기할 수도 있고 나중에 다른 판사가 어떻게 재판이 진행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엄숙히 선서합니다
인생의 한 장을 닫고 공익변호사로 새로운 출발을 한 이탄희 전 판사. 그는 “스스로 보기에도 희망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배우한 기자

엉뚱한 호기심이 들었다. 어쨌든 사법농단의 진상을 드러내는 단초를 마련한 영웅이 된 그를 정당들이 가만히 놔둘까. 더구나 내년 4ㆍ15 총선을 앞두고 새 인물을 찾기에 바쁠 테니까.

-사직하고 나서 영입 제안하는 정당이 있던가요?

“없었어요. 하하.”

-총선이 점점 다가오면 아마 제안이 올지도 몰라요, 혹시 정치할 생각 있나요?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웃기는 거 아니에요? 여기(공감)에 온 지 한 달도 안됐는데요!”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더욱 큰소리로 웃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뭔가요?

“남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의 일체감, 거기서 오는 당당하고 강해지는 느낌을 잃지 말자. 지키려고 노력해온 큰 원칙이죠.”

인터뷰의 중간 제목들은 바로 ‘판사 선서’다. 그를 만나면서 법관의 교과서를 다시 본 듯해 인용했다.

변호사 이탄희의 얼굴과 손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사표가 수리 된 후 40일 간 그는 스페인 남부에 머물며 ‘쉼표’를 찍었다. 인생의 2막을 그냥 시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2막에는 또 다른 벽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어쩌면 더 견고할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차별은 더 뿌리가 깊은 벽이니까. 그런데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가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보는 그와, 자신이 보는 그가 아마 가장 일치한 순간이기 때문 아닐까.

그가 말했다. “나는 장렬하게 쓰였죠. 그리고 성공했어요. 이제 또 다른 오늘을 살아야죠.”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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