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쓰러진 거목과 굳게 닫힌 문 
최필제가 자기 집에서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 포졸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영원한 작별과 재앙의 기색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 소식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보름 전인 6월 12일 밤에 정조는 갑작스레 다산의 집으로 서리를 보냈다. 내각에서 간행한 ‘한서선(漢書選)’ 10질을 보내며, 그 중 5질에 책 제목을 쓰라는 분부였다. 당시 정조가 전한 말은 이랬다. “오래 서로 못 보았구나.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려 하는데, 주자소(鑄字所)에 새로 벽을 발랐으니, 그믐께라야 비로소 등연(登筵)할 수 있겠다.” 서리는 이 말을 전하며, 책에 제목을 쓰라는 것은 핑계고 그저 안부를 물으시려는 마음인 것 같았다고 얘기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 이때 일을 이렇게 썼다. “서리가 떠난 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음이 흔들려 불안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임금의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시더니, 28일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가셨다. 이날 밤 서리를 보내 책을 내리시고 안부를 물으신 것이 마침내 영원한 작별이 되고 말았다. 군신의 정의(情誼)는 이날 저녁에 영원히 끝이 났다. 나는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눈물이 철철 흐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다산은 임금의 붕어(崩御) 소식을 듣자마자 홍화문(弘化門) 앞으로 달려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

정조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다산을 그저 둘 리 없었다. 목만중과 홍낙안, 이기경이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다산의 명줄을 끊어 놓을 다시 없을 기회였다. 이들은 날마다 흉악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위태로운 말로 세상을 현혹시켰다. 이가환과 정약용 등이 난을 일으켜 사흉팔적(四凶八賊)을 처단하려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사흉팔적의 명단 속에는 당시 재상과 명사가 절반쯤 들어있었고, 나머지 반은 홍낙안과 이기경 같은 자기들 부류의 인원을 채워 넣어 모함과 선동을 계속했다.

이재기의 ‘눌암기략’ 속에 뜻밖에 사흉팔적의 명단이 나온다. 사흉은 이재기와 이원규(李遠揆), 성영우(成永愚), 목인규(睦仁圭)이고, 팔적은 이 넷에 더하여 조중일(趙重日), 윤익배(尹益培), 최조(崔照), 김정원(金鼎元)이라고 했다. 이 명단에 ‘사암연보’에서 언급한 홍낙안, 이기경 등이 아예 빠졌고 재상 급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돌아다니던 사흉팔적의 명단이 여러 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이 같은 모함에 대해 이기경 등이 이가환과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다산에게는 그럴 힘도 없었다.

재앙의 기색은 점점 다산의 주변을 옥죄어 왔다. 5개월 간의 국상(國喪) 기간 중에는 일체의 사건 처결이 중지되었으므로, 이렇다 할 구체적 움직임은 없었다. 다산은 흉흉한 소문을 뒤로 하고 초천으로 돌아왔다. 3형제가 함께 모여 경전 공부를 하며 곧 다가오고야 말 무서운 침묵의 시간을 삼켰다.

 ◇태풍의 눈 속에 든 조선 교회 

이 태풍 전야의 고요 속에서 도리어 천주교회의 움직임은 전에 비해 부쩍 더 활발해졌다. 국상 중이라 포교들의 기찰 활동이 일체 멈췄고, 온 나라가 불안 속에 정국의 추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벽위편’은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800년 6월, 임금께서 돌아가시자 옥사(獄事)도 마침내 풀렸다. 새 임금이 어리신지라 정순대비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는 반년 동안 다시 신칙하여 금함이 없자, 천주교도들은 마침내 아무 두려워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가을과 겨울 이후로는 기세가 배나 성해져서 곳곳에서 설법을 하고, 심지어 부녀자들이 새벽이고 저녁이고 등불을 밝힌 채 거리를 왕래하며 서로 잇달아 자취가 끊이지 않았다. 섣달 무렵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밤중에 집에 돌아 갈 때 거의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이전에 보지 못하던 일로 여겼다. 1801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왕래하는 자가 마침내 끊어졌다. 그제서야 그들이 모두 천주교도인 줄을 알았다. 서울 시내가 이러 했으니, 멀리 떨어진 외읍이야 또한 미루어 알만 하다.”

‘눌암기략’에는 “1797년과 1798년 사이에 천주교 서적이 크게 성행해서 도서 대여점이 큰 이익을 얻었고, 한글로 된 것이 절반이 넘었다고 한다”고 썼다. 엄청난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 태풍의 눈 속에 든 천주교회는 곧 닥쳐올 절망적 시련을 짐작하지 못했다.

11월 하순, 국상이 끝나자 대왕대비는 노론 벽파로 대신의 진용을 즉각 교체해 버렸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12월 19일에 장흥동 어귀를 지나던 기찰 포교들이 어느 집 안쪽에서 “딱딱딱” 무언가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투전판이 벌어진 것으로 생각한 포교들이 창을 밀치고 뛰어 들었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면서 제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낸 소리였다. 이 날은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주의 봉헌 대축일이었다.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성모취결례(聖母取潔禮) 의식을 행하던 중이었다.

각 사람의 품속을 뒤지자 천주교 축일표가 나왔다. 처음엔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형조로 가져다 바쳤다. 그제서야 이들이 천주교도임을 알았다. 검거를 위해 그 장소로 다시 들이닥쳤으나 사람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의 동생 최필제(崔必悌) 베드로와 오현달(吳玄達) 스테파노가 붙잡혀 갔다. 이를 시작으로 검거 선풍이 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총회장을 맡고 있던 최창현(崔昌顯)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끌려왔다. 좌우포도청의 옥사가 금세 가득 찼다. 1801년 참혹한 신유옥사 박해의 서막이 이렇게 열렸다.

 ◇책롱(冊籠) 사건으로 체포된 다산 형제 

1801년 1월 11일, 대왕대비는 윤음(綸音)을 발표했다. 그것은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연좌제를 시행해 천주교가 다시 싹조차 나지 않게 뿌리 뽑고야 말겠다는 공개적인 선전포고였다. 정조 통치 시대의 천주교에 대한 처리 방식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이를 기화로 정적을 천주교도로 몰아 때려잡으려는 상소문과 통문이 그야말로 빗발쳤다. 사람들은 눈이 뒤집힌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이 와중인 1월 19일에 수습 못할 큰 사건이 터져 끓는 물에 기름을 끼얹었다. 화색이 닥쳐올 것을 짐작한 정약종은 보관 중이던 교회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천주교도 사이에 오간 글이 가득 담긴 책 상자를 한시 바삐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대인(任大仁) 토마스라는 교우가 책상자를 소나무 가지로 싸서 나뭇짐처럼 꾸며 지게에 지고 가다가, 포졸의 불심검문에 검거되었다. 포졸들은 어설퍼 보이는 나뭇짐 속에 밀도살한 소고기가 들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짐을 풀자 이상한 책 상자가 나왔다. 그는 즉시 포도청으로 붙들려 갔다.

상자를 열어본 포도대장 이유경(李儒慶)은 얼굴색이 싹 변했다. 상자 속에는 각종 천주교 서적뿐 아니라 그토록 찾던 중국인 신부의 편지까지 들어 있었다. 다산과 황사영의 편지도 있었다. 정약종의 일기장까지 나왔다. 글 속에는 선왕을 무함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선대왕 또한 천주교를 믿었다는 내용일 것이었다. 사안이 몹시 엄중했다. 조정은 잠행 모드로 돌입해 후속 조처를 준비했다.

2월 9일, 사헌부가 마침내 벼르던 칼을 뽑아 들었다.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을 체포해 국문하고 속히 형벌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즉각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이들은 모두 포승줄에 묶인 채 의금부로 끌려갔다. 2월 10일에는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죽은 채제공이 사학을 두호한 죄를 물어 사후임에도 관작을 추탈할 것을 주장했다. 2월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이 체포되어 압송되어 왔다. 전면적 공세였다. 한꺼번에 제방이 터진 듯 손 쓸 수가 없었다.

 ◇다산의 거짓말 

2월 10일에 영중추부사 이병모와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가 참석한 가운데, 붙들려온 이가환과 다산, 이승훈 등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다산이 예전 천주교를 믿은 자취가 드러나자 그것을 감추려고 변방소를 올려 변명한 일과, 그 뒤로도 은밀한 곳에서 요상한 짓을 거리낌 없이 행했고, 임금을 속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준절히 나무랐다. 이어 책롱에서 형제와 삼촌, 조카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나와 요사스런 행동이 파다하게 드러났으니, 천주교가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잊기 어려웠던 것이냐고 힐난했다.

다산이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임금의 큰 은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뼈에 살을 붙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찌 한 치의 거짓이 있겠습니까?” 심문관은 책롱에서 나온 편지에서 다산을 거론한 내용을 두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다산은 편지의 실물을 보여 달라면서, “위로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 형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게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심문관이 편지를 보여주자, 다산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편지 한 장을 더 보여주었다. 다산은 역시 모르겠다고 딴청을 했다. 심문관이 다시 물었다. “여기 편지 속에 나오는 정약망(丁若望)이 누구냐?” 다산이 대답했다. “저희 일가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 다산의 문답은 ‘추안급국안’의 심문 기록 속에 빠짐없이 나온다.

다산의 이 대답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정약망은 바로 다산 자신이었다.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이었다. 심문관은 약망이 세례명 요한의 한자 표기인 줄 모르고, 돌림자인 약(若)자 항렬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다산은 자신을 콕 집어 말했는데, 자기 집안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번에는 심문관이 다산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황사영입니다.” 황사영은 다산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초기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 중 다산에 가 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심문관의 질문은 편지의 내용을 따라 잇달아 관련 인물들을 호명해냈다.

이튿날인 2월 11일에도 다산은 다시 추국장으로 끌려 나갔다. 어제와 같은 추궁에 다산이 말했다. “1799년 형조에 근무할 때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지어 임금께 바치려 했습니다. 마침 비방을 입어 직책에서 교체된 지라 바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천주학을 하는 자는 제게 원수입니다. 이제 제게 열흘의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와 함께 나가게 해 주신다면, 이른바 사학의 소굴들을 마땅히 체포해 바치겠습니다.” 다산은 이번만큼은 모면하기 어려운 것을 알았다. 다급했던 다산의 심경이 이 대답 속에 드러났다. 이날 다산은 곤장 30대를 맞고 실려 나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