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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피의 연대기

입력
2019.05.29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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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에서 열린 ‘대놓고 월경파티, 월경 피크닉’에서 여성환경연대 회원들과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25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에서 열린 ‘대놓고 월경파티, 월경 피크닉’에서 여성환경연대 회원들과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을 하며, 그 양이 많은지 떠들어댈 것이다. 처음 ○○을 한 소년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과 종교 의식, 가족 파티가 마련된다. 정부는 ○○대를 무료로 배포한다. 의회는 국립 ○○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 ○○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 ○○ 중인 남자들이 올림픽에서 더 많은 메달을 딴다는 사실이 통계로 증명된다.”

페미니즘의 대모이자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Ms.)’를 창간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1984년에 쓴 페미니즘의 고전, ‘남자가 ○○을 한다면’에 나오는 발칙하면서도 탁월한 상상력이다.

5월 28일 어제가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세계 월경의 날’이다. 독일의 NGO 워시 유나이티드가 주도해 2014년부터 시작됐다. 여성의 평균 월경 주기 28일, 생리 기간 5일에서 간택한 날짜다.

여성환경연대는 ‘대놓고 월경파티, 월경피크닉’을 열었다. ‘월경박람회’라는 것도 처음 개최됐다. 작년 집회에서는 여성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붉은 음료로 “월경에 치어스!(cheers)”라고 외치며 건배했다. 생리대를 빨갛게 칠해 전시한 이벤트도 있었다. 자매들의 진한 ‘피의 연대기’가 매년 이어진다. 내년에는 외국처럼 생리혈을 뿌리는 시위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너희가 생리대를 알아?” 2016년 초경을 맞은 한 가난한 집안의 여학생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운동화 깔창으로 대신했다. 눈물겨운 ‘깔창 생리대’ 사연은 즉시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이나 미투 폭로만큼이나 한국 여성사나 페미니즘 역사에 획을 그은 계기였다. 생리대를 공공재로서 지원하라, 값을 낮춰라, 인체 유해 물질이 있는지 국가는 철저히 검사하라는 여성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생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비로소 본격 발화했다. 생리란 단어는 드디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밖으로 나왔다. 생리대는 꽁꽁 묶은 검은 비닐 봉투 안에서 탈출했다. ‘월경권’이 등장했고 생리는 ‘정치적’ 문제가 됐다. 국가와 지자체들이 저소득층 가정이나 지역 내 모든 여학생에게 생리대를 무상 지원하는 정책을 앞다퉈 만들었다. 일부 공공장소에는 무상생리대가 비치되고, 생리대 성분 표시가 의무화됐다.

참 오래 걸렸다. 일회용 생리대가 한국에 등장한 지 약 50년이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는 달거리가 찾아오면 샅에 개짐을 찼다. 생리대는 1995년까지 TV 광고 금지 품목이었다.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줄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 후의 광고는 한결같이 “그날이 와도”를 속삭였고 여성은 파란 피를 가진 에일리언이었다.

작년 말 처음 한 업체의 광고에서 ‘생리’라는 단어가 발설됐다. 광고 속 소녀는 더는 하늘하늘한 하얀 옷을 입고 하늘을 날거나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그날이 와도 걱정 없어요”라며 까르르 웃지도 않았다. 소녀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날이 도대체 뭔데? 아프고 신경질 나.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게 바로 생리라는 거야.” 최근의 다른 업체 광고는 더 나갔다. “생리 터진다. 축축찝찝. 대환장 생리파티!” 피도 드디어 제 색깔을 찾았다. 여성들의 열화와 같은 댓글이 붙었다. “광고가 드디어 정직해졌네요.”

“의회 본회의장에서 생리대 운운은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 했던 한 지방의회 의원님이 이 광고를 봤다면 밥맛이 떨어졌을까 궁금했다. 생리를 선택한 여성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월경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다. 올해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민관 공동협의회에 책정된 예산은 불과 1억7200만원이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 정부는 100조원이 넘는 세금을 퍼부었다. 건강한 생리를 해야 애를 낳는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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