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은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재연해서 기억을 되살리고, 사람들과 사회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술의 궁극적 의미죠.”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연극연출가 로베르 르빠주(62)는 2015년 내놓은 1인극 ‘887’에서 ‘기억’을 주 재료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르빠주가 ‘887’을 국내 초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의 내한은 12년 만으로, 이번엔 직접 무대에 오른다. 27일 서울 정동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르빠주를 만났다. 그는 ‘887’을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작품으로, 기억의 의학ㆍ과학적 측면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룬다”고 소개했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르빠주는 첨단 기계장치를 활용한 환상적인 무대 효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의 작품에는 영상, 디자인, 음악, 오페라, 인형극 등 다양한 분야가 녹아 들어 있다. 1992년 북미 출신 연출가 중 처음으로 영국 로얄내셔널씨어터에서 ‘한 여름밤의 꿈’을 연출했으며, 2002년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태양의 서커스도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887’은 무대 위 유일한 등장 인물인 르빠주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작한다. 그는 3쪽 분량의 시가 생각처럼 잘 외워지지 않아 절절 맨다. 르빠주는 ‘기억의 궁전’이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기억법을 활용하기로 한다. 가장 익숙한 공간에 외워야 할 것들을 배치해 뒀다가 재조합해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이다. 르빠주가 익숙한 장소로 택한 곳은 어린 시절 그의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던 아파트다. 이야기 속 모든 인물과 이들이 겪는 사건은 전부 실화다. ‘887’은 그 아파트의 번지다.
르빠주가 소환한 어린 시절인 1960년대는 캐나다 퀘벡의 정치ㆍ문화적 격동기였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887’이 퀘벡의 근대사로까지 확장되는 이유다. 1960년대의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르빠주는 당시 유행한 팝음악 등을 적극 활용한다. 어린 시절의 아파트와 현재의 집을 오가며 회전하는 무대 세트, 다양한 미니어처 모형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연극의 인기가 예전만 못한 시대이지만, 르빠주는 연극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집에 편하게 앉아 넷플릭스로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시대죠.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 됐어요. 하지만 연극의 힘은 여전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고, 공동체로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 말이지요.” 르빠주의 힘, 연극의 힘이 응축된 ‘887’은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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