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호가 바뀌었고 해서 내 수업을 듣는 일본인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본의 주인이 누구야?”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자네들은 일본에서 20년 정도는 살았을 텐데 나라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나?”
한 학생이 답한다. “아베 신조 총리입니다.” “아니지. 그 사람은 관리자일 뿐. 자네 돈을 은행에 맡긴다고 돈 주인이 은행이 되나?” “모르겠나? 일본은 군주국가이니 일본의 군주, 자네들의 왕, 천황이 주인인가?” ‘천황’ 표현이 나오자 학생들은 더더욱 답을 못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본 설계도를 담은 문서가 헌법이네. 헌법대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말이지. 그 헌법에 일본의 주인이 누구라고 되어 있나?”
“자네들 헌법 1조에 보면 천황은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되어 있네. 그리고 나라의 주인 되는 권리, 즉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했어. 일본의 군주는 상징일 뿐 권력은 없다는 거지. 정치적 힘은 자네들과 자네들의 부모, 이웃과 같은 평범한 일본인들로 구성된 국민에게 있는 것이야. 그러니 일본은 민주국가이네. 민주국가의 주인은 저 도쿄의 황거나 총리 관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교실에 있는 자네들일세.”
“선생님, 그 헌법은 맥아더가 만들어 준 것 아닌가요?” 한 학생이 물었다. “그렇지. 일본은 패전 후 7년간 미국 지배를 받았네. 지금 헌법은 사실상 그때 미국인들이 만들어 줬지. 하지만 지난 70년간 그 누구도 진지하게 헌법 1조를 바꾸자는 사람이 없었어. 이 헌법은 이제 자네들의 헌법이 된 거지.”
“지금 헌법은 자네들의 두 번째 헌법이야. 첫 번째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어 1889년에 공포했네. 첫 번째 헌법에서 일본의 주인은 천황이네. 1조에서 ‘일본은 천황이 통치한다’고 했고, 3조에서 ‘천황은 신성하다’고 했어. ‘국민주권’에 대한 언급은 있지도 않아. 그러니 헌법으로 보면 패전 후 일본은 살아 있는 신,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로 새로 태어난 것이네.”
“민주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 나라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말일세. 왜냐하면 자네들 하나 하나가 다 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야. 자네들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이 바로 이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야. 자네들을 위해 천황과 총리가 있지, 그 반대가 아니야. 이제 다시는 천황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로 돌아갈 수 없어.”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자네들은 다른 나라의 주인들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네. 세상에는 일본만 있는 것이 아니야. 다른 나라들도 있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모든 나라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 개개인이야. 자네들이 일본의 주인으로 대접받고 싶다면 자네들도 다른 나라의 주인인 국민 개개인의 자유, 평등, 행복을 존중해야 하네.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나라의 주인되는 개개인들이 존중받을 때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네.”
“그러니 평화를 원한다고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야 하네. 개인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가로 막는 압제자는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자네들의 적이야. 반대로 개인의 자유, 평등, 행복을 소중히 하는 이들은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 자네들의 형제 자매이네.”
“이 원리를 잊었을 때 일본은 괴물이 되었네. 수백만의 일본인과 그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그 괴물에게 희생당했어. 주인이 주인되기를 포기했을 때 괴물이 주인이 된 것이야.”
“다시 묻겠네. 일본의 주인이 누구야?”
“접니다” “접니다” “우립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손을 들며 외친다. “이제 주인으로서 말하고 행동할 준비가 되었나?” “네!”
학생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이번 학기 수업, 왠지 흥미로울 것 같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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