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 나가사키 운젠화산(雲仙岳)은 인근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와 함께 유엔과 국제 화산ᆞ지질학회가 특히 경계해야 할 활화산으로 지목한 16개 중 하나다. 폭발 위험이 크고, 주거지역과 인접해 대규모 인명피해 가능성이 높은 활화산이란 의미다. 1792년 대형 분화와 화산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1만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200년 만인 1991년 6월 3일, 운젠화산이 다시 폭발했다. 인근 지역 주민 1만2,000여 명은 일찌감치 대피해 무사했지만 신문ㆍ방송 기자 16명을 포함해 소방관 경찰관 등 40명과 외국인 화산학자 3명이 고온 화산쇄설류에 휩쓸려 숨졌다.
긴 동면 끝에 운젠이 깨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건 1989년 11월 무렵이었다. 최고봉 푸젠다케 서쪽 10km 근방을 진앙으로, 지하 12km 지점서 시작된 화산 지진은 점차 고도를 상승해가며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딱 1년 만인 1990년 11월 화산가스 분출이 처음 관측됐다. 그 압력으로 봉우리 지층 형태가 부풀던 끝에 91년 5월 20일부터 용암이 뿜어 나왔다.
화산 폭발에서 용암보다 위험한 게 화산쇄설류(火山碎屑流)라고 한다. 점성이 강해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는 용암과 달리 쇄설류는 화산재와 작은 용암괴가 수백 도의 고온가스와 함께 수평 혹은 사면을 따라 사선으로 폭발적으로 분출된다. 위험을 감지한 당국은 즉각 주민들을 대피시켰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파괴력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다. 경찰ㆍ소방관은 명령과 지시에 따라 현장 외곽에 남았고, 극적인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함께 남았던 방송 및 사진 기자들도 특별한 제지를 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후 치열한 ‘사명감’ 혹은 ‘공익과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뜨겁게 추모됐다.
프랑스의 부부 화산학자이자 가장 대담한 화산 영상 촬영가들로 꼽히던 카티아(Katia, 당시 49세)와 모리스 크라프트(Maurice Krafft, 45세) 부부도 그날 현장에서 희생됐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대 동창으로 1970년 결혼한 부부는 대학이나 연구소보다 화산 현장을 더 좋아했던 모험가이기도 했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화산 촬영을 시작했고, 때로는 지역 당국의 주민 대피령을 촉구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조차 운젠 화산의 독기를 과소평가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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