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제가 원하는 목표는 모두 이뤄온 편이에요. 서울에서 외국어고와 명문대를 나와 현재 대기업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 생활을 하고 있어요. 저는 뭐든 제 뜻대로 해야 하고, 언제나 계획적으로 움직여요. 평소에 다이어리를 2개씩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매주, 한달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체크해요. 가령 주3회 공복운동을 하고, 주말에는 욕실청소와 방 청소 하는 것을 규율처럼 지키는 편이에요. 다이어리를 쓸 때 아주 작은 오자도 용납하지 못해 늘 지우개와 수정테이프를 가지고 다닙니다.

저의 아버지는 공기업에 다니셔서 매우 원칙적인 분이시고,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염치와 체면을 중시하셨어요. 동생이 두 명 있지만 부모님은 제가 뭘 하든 스폰지처럼 흡수하고 당신들의 기대치보다 더 잘하는 딸이었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만큼 제게 엄격했습니다. 저는 하라는 대로 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어요.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컸지만, 고등학교 때 원하던 학교를 가지 못했던 것은 제 인생에 큰 충격이었어요. 제 불합격 소식에 어머니는 슬피 울었고, 아버지는 술을 잔뜩 드시고 저를 때렸어요. 그때 저는 대학 입시에는 절대 실패하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그때 ‘넌 이것도 못하냐, 한심하다’ 등 제 스스로 모진 소리와 욕설을 일기장 가득 써놓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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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성미도 있겠지만 회사에서 늘 바쁜 일정에 쫓기고, 업무 특성상 마감과 상부 보고가 중요해지면서 저는 분노가 쌓였던 것 같아요. 상대가 정확도와 완성도, 마감시간 준수 등을 안 맞추면 저는 몹시 화가 나 제 스스로 통제하기가 힘들어질 정도에요.

가족과도 마찰이 많아요. 저는 매일 저녁 제가 샤워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일과에 지장이 없도록 모든 계획과 동선을 고려해 정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그 시간에 화장실을 먼저 쓴 동생에게 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했습니다. 성인인 남동생이 겁에 질려 방에 들어가 훌쩍이며 울 정도였으니깐요. 어버이날을 기념해 가족들끼리 저녁을 먹으려고 한달 전에 예약한 식당을 동생이 이틀 전에 바꾸자고 했을 때도 저는 내심 기분이 상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갑작스레 약속을 취소하면 마음에 드는 식당을 갈 수 없어서였어요. 결국 바꾼 식당에서 제가 화를 참지 못하고 동생과 식당 직원에게 화를 내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어요.

이성과 데이트 약속할 때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상대가 깜빡 잊고 예약을 못하면 참질 못하겠어요. 상대가 저를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서운하고, 원망스러워 악을 쓰며 울었어요. 상대는 그 뒤에 저한테 잘해주었지만, 저는 그가 미덥지 않아 제가 직접 모든 데이트 계획을 짜기도 했어요. 그는 결국 저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옆에 있는 것 같고 나날이 자존감이 떨어진다며 이별을 통보했어요. 어머니도 제게 “너는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너는 욕심이 많으니까 훨씬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제 생각에 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이 노력해왔으니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제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으면 정말 화가 많이 나고 제 스스로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최혜리(가명ㆍ30ㆍ회사원)

혜리씨, 당신은 몸이 자유로워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결정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마음의 감옥에서 살고 있네요.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마음의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당신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정해놓은 틀 안에 자기자신과 타인을 가두고 통제하지 않으면 불편해지고, 마음이 괴로워서 견디기 힘들어해요.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는데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느라 정작 당신이 누려야 할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지조차 못하는 듯해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사연에서 느낀 당신은 매우 통제적인 사람이에요. 자신의 생각과 상황을 통제하려는 강박을 갖고 있어요. 당신도 이미 그걸 알고, 몹시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당신은 왜 그렇게 됐을까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해요. 타고난 기질, 개인의 성격, 경험, 문제 해결하는 방식들이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살면서 수많은 상황들을 경험하지요. 그 과정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꼈는지, 마음에 어떤 감정으로 남아 있는지 등 어린 시절 부모와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고 이후의 인생에 영향을 많이 주지요.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사람에게는 부모가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어른이 돼서 겪는 문제의 100%가 부모의 탓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인이 돼서 현재 겪고 있는 괴로운 감정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형성에서 비롯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존재가 부모이기 마련이지요. 이를 부모 탓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본인이 부모로부터 이런 영향을 받은 것을 알고, 안다는 전제 하에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할까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늘 꽃길만을 걸을 순 없어요. 좋은 일만 생길 수도 없고요. 심지어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나쁘지요.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도 갈등과 오해가 생기고,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길은 피할 수 없고 모두가 겪어요. 부모는 자식에게 인생을 살면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지요. 인간을 나무라고 비유하면 뿌리째 흔들리지 않는 힘을 길러줘야 합니다. 내면의 힘을 어떻게 기르는지, 감정적으로 어떻게 소화할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이런 걸 알려줘야지요.

제 생각에 당신의 부모는 당신에게 부와 재산, 학벌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물려주려고 한 거 같아요. 그것만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 부모가 울면서 괴로워하고, 심지어 폭력을 썼어요. 물론 혜리씨 부모처럼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엄청나게 뒷바라지하는 부모들이 많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게 뭐가 나쁜 건가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요. 하지만 갈등이 생겼을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법, 목표를 향해 노력했지만 잘 안됐을 때 극복하는 법까지도 함께 알려줘야 해요. 혜리씨의 부모는 이런 과정들이 없이 마지막에 결과물만 놓고, 자식이 결과적으로 잘되는 데만 급급했어요. 성취 지향적인 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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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좋은 학교에 못 가면 부모가 같이 울거나 낙심하지 않고, “넌 최선을 다했어, 너를 떨어트린 그 학교가 손해지, 네 인생은 아무렇지 않단다. 지금 당장은 속상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어. 나중에 돌아보면 오히려 학교에 떨어진 게 더 잘됐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거야”라고 해줬더라면 어땠을까요. 인생은 다양한 길이 있고, 절대적인 원칙과 도덕적 기준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대안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유연하게 살아가지요. 인생의 목표는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이지, 어느 하나의 방법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혜리씨처럼 매사 열심히 하는 건 좋은 자세이에요. 그래야 자기 만족감이 생기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가 열심히 했으니 이 정도면 됐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있거든요. 그런데 혜리씨는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자책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이는 부모가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것을 마치 잘못된 일을 한 것처럼 반응해서 혜리씨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에요.

혜리씨의 부모는 당신에게 명석한 두뇌를 물려줬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어요.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에서 긍정적이고 즐거웠던 경험과 추억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인간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아요. 돈이 많다고 해서, 집이 크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부모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 힘들 때 나를 감싸 안아 주었던 경험으로 힘든 것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되찾으면서 인간은 행복을 느껴요. 공부를 하라고 심하게 다그치는 부모들을 종종 봅니다. 이들은 아이가 잘되라고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그런 지나친 다그침과 채찍질, 비난과 지적, 모욕, 두려움을 좋은 경험과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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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리씨, 부모를 원망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당신이 부모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이해하고 알아야 당신의 괴로움을 좀 가라앉힐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똑똑하고 유능해요. 저는 그런 당신의 마음이 좀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당신의 일상에서 일단 뭐가 제일 중요한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답은 하나가 아니고, 언제나 정답일 수도 없어요. 오답을 선택해도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지 않아요. 망하지 않아요. 또 반대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했다고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지도 않아요. 당신이 생각했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만 고려하고 나머지는 다 밀어놓으세요. 어머니 생신이어서 식당을 한달 전에 예약했다면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어머니 생신을 온 가족이 축하하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식당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허름한 식당에서라도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하고 맛있게 식사를 한 것을 중요하다고 여기면 나머지는 아무려면 어떨까요.

중요한 것과 보다 덜 중요한 것을 잘 구분하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그림을 보러 간다고 가정해보죠. 미술관에서 편안하게 마음껏 그림을 보면 되는데, 혜리씨는 미술관에 가는 시간, 머무르는 시간, 가는 방법, 날씨 등의 덜 중요한 요소들도 모두 충족돼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게 하나라도 안 맞으면 그림을 보러 가지 않거나, 가서도 기분이 좋지 않아요.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지 등 자신의 내면을 천천히 생각해보아요. 그러려면 당신이 이제껏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꾸준하게 노력을 해야 해요. 전문가의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보는 게 좋아요. 아는데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강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혜리씨도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서, 잘 실천이 안될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혜리씨가 생각하는 조건들이 모두 채워져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본인이 마음을 열고, 치료를 따라 가다 보면 나아질 수 있어요. 열심히 살아온 혜리씨! 저는 진심으로 혜리씨가 그 어떤 것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바랍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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