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인문학 코너에서 고객들이 인문학 관련 책을 살펴보고 있다. 김주성 기자

읽고 듣고 쓰는 걸 좋아한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여전히 글을 쓰는 건 힘들다. 글을 읽고 생각을 다듬는 시간, 글을 쓰고 고치는 초조함, 출판된 글을 읽으며 느끼는 서늘함 등은 연구자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논문 작업의 막바지에 참고문헌 목록을 정리하며 그동안 읽은 글, 버린 글, 이해하지 못해 놓쳤을 생각들을 떠올릴 때면, 논문을 만드는 고되고 지루한 이 과정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럴 무렵 시내로 나갈 핑계를 만들고 어느 빌딩 지하 서점에서 논문의 참고문헌으론 쓰질 못할 글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그의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라는 글을 읽으며, 초등학교 옆 골목에서 먹던 납작만두의 질감과 종지에서 퍼지던 간장 냄새, 펄럭이던 천막 속 서늘한 그늘을 느낀다. 그 책의 얘기처럼 내 몸속에서 태아처럼 숨어 있던 그 맛은 어느 뼛속으로부터 벗어나 5월 봄볕과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다가온다. 그 초등학교 강당 옆 공터에서 떠들던 풍경과 함께.

시집 코너에선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느 시인의 시집을 찾아내고 반가워한다. 시집을 뒤적이다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류근, ‘나에게 주는 시’,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 지성사)이라는 시를 읽고선, 마지막 술잔을 마시는 시점과 철새가 머나먼 여로를 바라보는 순간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기껏 하루 저녁 술자리를 마친다는 것이 수십 일 동안의 여정을 결단한 새들의 다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추억이 무거워지는 상처’를 떠올리다, 술자리를 마친다는 것이 어떤 사람과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 결심과 익숙한 곳을 떠나는 새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사람이 없는 곳과 새들이 경험할 낯선 지방은 동일시할 수 있다. 문득, 언제쯤 그런 상처를 지나칠 정도의 둔감함을 갖게 될까 라는 궁금함도 갖는다.

서가에 놓인 책들의 제목을 훑고 그 내용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시 생활로 돌아갈 용기를 얻곤 한다. 규칙적인 일상이 주는 긴장감, 시한에 쫓겨 작업에 필요한 글을 읽으며 느끼는 초조함 등이 주는 활력도 있지만, 무용(無用)한 글을 읽을 때 얻게 되는 편안함과 자신감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서가엔 실용서와 투자 지침서들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장소와 역사에 대한 불필요할 정도의 깊은 관찰, 재산의 증식과는 무관한 삶에 대한 고민을 다룬 글들이 여전히 서점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필요한 일을 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쓸모없는 글 속에서 우리는 문득 공감하고 격려를 얻는다. 그건 우리가 더 좋은 삶으로 돌아갈 힘을 준다. 스스로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책임감으로 지칠 때, 그때가 우리가 그런 글을 읽어야 할 시기다.

어느 대학교에선 문과생을 조롱하는 현수막이 걸렸다고 한다. 취업률이란 단일한 가치, 이른바 고용가능성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내걸고 있는 대학 정책을 고려할 때, 이를 두고 학생을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인간과 당대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없을 때, 우리는 그저 하나의 숫자로 표시되는 물체일 뿐이다. 불필요한 글을 읽고 생각하며 공감할 때, 그리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민에 빠질 수 있을 때, 인간은 다른 종(種)과 구별된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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