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후예’ 외친 文 분노ㆍ고집 궁금
“민주정부 꼭 성공” 8주기 文 약속 흔들
‘시장 실용주의’ 수용한 盧 고민 성찰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엊그제 청와대 수석ㆍ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며 또다시 추경예산안의 조속한 처리를 정치권에 주문했다. 지난달 25일 국회에 추경안을 제출한 이래 6번째 당부이자 독촉이다. 대내외 경제환경에 따른 위기감 때문인지 표현도 ‘간곡히 부탁’ 등 읍소에 가깝다. 장외투쟁과 보이콧으로 뻗대는 자유한국당을 향한 것이다. 앞서 5ㆍ18 기념식에서 ‘독재자의 후예’라고 몰아붙이던 기세와는 확연히 다르다. 문득 의문이 든다. 두 사안의 성격이 전혀 다르긴 하나, 국정 책임자로서 야당의 협조를 간절히 원한다면 분노를 삭이며 격한 반발이 예상되는 수사는 피하는 게 상식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호위무사이자 문재인 정부의 창업공신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최근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그는 얼마 전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과 함께 진행한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두 사람을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노무현은 겉은 강하지만 속은 여리고 섬세하다. 문재인은 겉은 섬세하고 여리지만 속은 훨씬 기개 있고 단단하다. 스타일은 달라도 세상을 보는 따뜻함과 뜨거움은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무현은 고집이 세지만 참모와 토론을 즐긴다. 문재인도 토론하고 수용하는데 어떤 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문재인의 고집이 훨씬 세다”고 평가했다. 유 이사장도 맞장구를 쳤으니 맞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종종 ”나는 약속에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집스레 약속에 집착한다는 뜻이겠다. 이런 성격과 태도는 상당 부분 동지이자 친구인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연관돼 있다. 문 대통령은 2011년 노무현 2주기를 맞아 펴낸 자서전 ‘운명’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이 책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던 그가 이듬해 18대 대선에 나서는 출사표가 됐고, 19대 대선에서 그 운명과 만났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8주기 추도식에 참석, ”민주주의와 인권, 복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 차별이 없는 나라를 만들려던 그의 꿈이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부활했다”며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꿈이라고 강조한 그는 또 김대중부터 박근혜까지의 20년 정부를 성찰해 민주정부 연속 집권의 길을 닦겠다고 약속한 뒤 임기와 임무를 다한 후 다시 찾겠다고 했다.
이 다짐은 손쉽게 실현되는 듯했다. 수십년 묵은 때를 벗겨내는 적폐 청산 작업과 노동ㆍ원전ㆍ분배 등 전 분야의 진보적 의제를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 참여정부 시절 우물쭈물하다 저항세력에 되치기당한 경험이 반면교사가 됐다. 낡은 보수정권을 탄핵한 촛불 민심은 ‘사이다 개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는 지난해 지방선거 압승으로 나타났다. 무기력과 자중지란에 빠진 야당 도움도 컸다. 그러나 1년 만에 상황은 급반전했다. 능력과 탕평을 외면한 캠코더 인사와 도덕적 우월주의가 가장 큰 문제였다. 선의로 추진한 경제ㆍ민생 정책이 악의로 되돌아오고, 협치보다 명분과 정의로 몰아친 국회는 실종됐다. 평화도 안갯속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반 토막 나고 국정동력 소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많은 정치적 미숙과 정책적 오류를 지적하지만 정치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비즈니스임을 간과한 잘못이 제일 크다. 대통령의 신념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삶과 국가 미래를 책임지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찍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배경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를 성찰한다고 했지만 그가 왜 지지층을 거스르며 대연정이나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는지, 또 시장권력을 수용하며 ‘좌파 신자유주의’를 자처했는지 깊게 공부한 것 같지 않다. 3년 뒤 노무현은 문재인을 “야, 기분좋다”며 반길 수 있을까.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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