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13>에로 영화의 서막, 호스티스 영화
검열의 시대에 아이러니하게 호스티스 영화 붐 이끌어
원작자 최인호와 절친… 막무가내로 동생 등록금 던져주고 판권 가져와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영화계에는 성인멜로물,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붐이 몰아쳤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이 서울관객 46만5,000명에 달하는 공전절후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불붙은 호스티스 영화의 유행은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6)가 36만명, ‘겨울여자’(1977)가 58만명을 동원하면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1975년 서울에서의 극장 성적을 기준으로 5만명 이상을 동원해 손익분기를 넘긴 영화가 고작 5편에 지나지 않았던 지독한 침체기의 와중이었다. 호스티스 영화의 이례적인 상업적 성공은 ‘창수의 전성시대’ ‘미스 염의 순정시절’(1975),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O양의 아파트’(1978), ‘나는 77번 아가씨’(1979) 등 아류작의 무분별한 양산으로 이어졌다. 한국영화의 저질화를 가속화한 일면도 있으나, 쇠락일로를 걷던 한국 영화 산업에 한 줄기 숨통을 틔워주었다.
◇“아무 소리 안할 직업군” 호스티스
호스티스 영화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독재 정권의 검열과 통제는 사회의식이나 작가적인 비판 정신이 담긴 영화가 제작되는 길을 철저히 틀어막았다. 검열을 내면화한 영화인들은 생존을 위해 보수적인 제도권이 허용하는 범주 안에서 문제 삼지 않을 안전한 소재를 찾아야 했다. 당대의 스타 신성일은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에서 호스티스 영화가 대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두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게다가 검열을 부르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어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군이 있잖아요. 교수라든지 변호사라든지 의사라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조금이라도 비도덕적이고 불미스러운 것을 다루면 항의가 들어와요. 그런 항의도 검열의 빌미가 되어 영화가 왜곡되니까 재미가 없잖아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군도 마찬가지였어요. 버스 차장을 다루면 삥땅, 버스 회사에서 당하는 수모, 인권 문제 같은 게 나올 수 밖에 없잖아요. 이런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버스 차장들이 데모를 했어요.(중략) 그러다 찾아낸 게, 항의할 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안하는 직업군을 다루게 된 겁니다. 그게 호스티스였던 거죠.”
인텔리 남성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하층민 여성을 수렁에서 건져내 사랑에 빠진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호스티스 멜로의 상투적인 도식은 공업화와 산업화가 지상과제로 여겨지던 시대의 맥락과 맞물려 있었다. 생계를 잇고자 상경한 젊은이들이 도시 노동자가 되어 경제의 하부구조를 떠받쳤고, 여공이나 식모 일을 찾아 도시로 온 여성들은 벌이가 나은 일을 찾아 향락산업으로 내몰렸다.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도시의 슬럼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노동 문제 등 고도성장기에 수반되는 사회적 병폐의 그늘이 차츰 드리우고 있었다. 호스티스 영화는 TV 방송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자극적인 섹슈얼리티를 흥행코드로 삼고자 한 영화계 나름의 현실타개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감한 이슈를 다룰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현실 세태를 반영하고자 한 몸부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문예영화 전성기도 한 몫
음란과 외설, 퇴폐를 몰아낸다는 검열 당국의 취지와는 모순되게도, 호스티스 영화가 용인될 수 있었던 데에는 문예영화의 전성기라는 점 또한 작용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호스티스 영화들은 문학을 원작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1973),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1973), 조해일의 ‘겨울여자’(1975)은 동명의 영화로 극장에 걸려 인기몰이를 했고, ‘모범작문’은 ‘여자들만 사는 거리’로 영화화되었다. 신문에 연재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들을 영화화하면 소설의 독자층이 고스란히 영화 관객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영화사의 상업적 셈법과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을 내세우며 문예영화의 제작을 권장했던 유신정권의 문화 정책이 기묘한데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문예영화의 붐은 곧 호스티스 영화의 붐이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으로 호스티스 영화의 유행을 일으킨 이장호는 젊은 영화감독과 평론가들이 모여 세운 영상시대의 일원이었다. ‘한국영화의 예술화’와 ‘뉴 시네마 운동’을 외치며 함께 영상시대를 발족시킨 동료 감독들 중 하길종과 김호선이 뒤를 따르듯 ‘속 별들의 고향’(1978)과 ‘영자의 전성시대’를 들고 호스티스 영화의 대열에 합류한 건 다소 얄궂은 감이 없지 않다. 이장호가 ‘별들의 고향’의 영화화를 맡게 된 건 기막힌 우연의 산물이었다. 작가 최인호는 덕수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막역한 친우였고, 이장호는 ‘별들의 고향’을 신문에 연재되기도 전에 대학노트로 읽었다. 입봉은커녕 신필름의 새파란 제 2조감독에 지나지 않는 처지였지만, 소설에 매료된 이장호는 막무가내로 시위를 벌였다.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통째로 빌려다가 최인호의 집에 판권료랍시고 말도 없이 던져놓고 나온 것이다. 기가 막혔던 최인호는 전화통을 붙잡고 외쳤다 “야, 이 새끼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네 마음대로 해! 난 더는 상관 않겠어!” 영화화 판권이 이장호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단행본 발매로 100만부 넘게 팔아 치운 베스트셀러의 영화화 판권이 약관 29세의 애송이 손에 있다는 소문은 충무로에 금세 퍼졌다. 새내기가 감독 데뷔를 준비하자 난처해진 신상옥 감독은 이장호에게 연출을 하는 대신 촬영은 선배인 이형표에게 맡기라는 제안을 했다. 명색만 감독이지 막상 현장에 가면 실질적인 연출권을 빼앗기리라 걱정한 이장호는 바로 짐을 싸고 신필름을 뛰쳐나왔다. 그에게 있어 ‘별들의 고향’의 연출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숙원이었다. 영상시대의 동료였던 시나리오 작가 홍파가 시나리오를 잘 써 줄테니 판권을 달라고 제안하자 바로 앞에서 맥주잔을 부수고 유리조각을 입으로 잘게 씹어 협박할 정도로 이장호는 비장했다. 때마침 하길종의 사돈이었던 화천공사의 사장 박종찬을 소개받으면서 ‘별들의 고향’의 제작에 마침내 파란 불이 들어오게 된다.
◇청년 감독 이장호의 등장
필름을 반으로 잘라 ‘하프 사이즈’로 나눠 쓰는 테크니스코프 촬영 방식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이장호는 ‘하프 사이즈’가 아닌 제대로 된 코닥필름 3만자를 들여서 찍고, 대신 연출료는 감독협회 규정의 최저금액으로 받겠다고 선언하는 등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뚝섬 광나루 백사장에서의 첫 로케이션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머리는 백지가 되었다. 호기롭게 감독을 하겠다고 나선 건 좋았지만, 막상 감독이 맡은 역할과 일에 대해 체계적인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영화검열관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신필름에 입사했었지만 1년 남짓 한국 홍콩 합작 현장에서 일한 게 경험의 전부였던 이장호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이장호를 구원한 건 물불 가리지 않는 본인의 패기였다. 첫 장면을 롱숏으로 찍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현장은 봇물 터지듯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해진 콘티도 없었고, 시나리오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틈틈이 원작 소설책을 살펴보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대로 즉흥적으로 연출했고, 장석준 촬영감독과 현장에서 논의를 주고받으며 매 장면들을 다듬어나갔다. 고삐 풀린 천재의 직관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찍은 필름들은 편집실로 보내져서야 영화다운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편집과 음악, 모든 것이 경험이 일천한 아마추어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맨땅에 헤딩하듯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며 온몸으로 영화 만들기의 실제를 터득해나간 이장호의 작업은 당대 한국영화의 관성에 매이길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별들의 고향’은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호스티스 영화의 유행을 선도하며 충무로에 청년세대의 감성과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독학자가 거둔 통쾌한 승리였다.
1975년 신중현, 조용필 등 연예계 인사들이 대거 잡혀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이장호는 감독직을 박탈당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4년의 공백기를 이장호는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작가로서 깊어지는 성숙의 시간이었다. 유신 정권이 종식되고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 선언’(1983)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사회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거듭난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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