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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고객의 이익보다 사실을 쫓은 사설탐정

입력
2019.05.20 04:30
수정
2019.05.23 14:53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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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페치하이머(1942~2019)

데이비드 페치하이머는 60년대 중반 대실 해밋의 소설 '몰타의 매'를 읽고 "재미 삼아" 사설탐정 일을 시작했다가 아예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문과 대학원을 중퇴하고 전업탐정이 된 사람이다. 무모하리만치 낭만적인 동기와 달리, 일에 관한 한 그는 무척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샘 스페이드’와 달리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캘리포니아 힐즈버그 포도 농장의 그(왼쪽)와 저널리스트 출신 범죄소설 작가 에이스 애트킨스. 트위터 @aceatkins 사진.
데이비드 페치하이머는 60년대 중반 대실 해밋의 소설 '몰타의 매'를 읽고 "재미 삼아" 사설탐정 일을 시작했다가 아예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문과 대학원을 중퇴하고 전업탐정이 된 사람이다. 무모하리만치 낭만적인 동기와 달리, 일에 관한 한 그는 무척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샘 스페이드’와 달리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캘리포니아 힐즈버그 포도 농장의 그(왼쪽)와 저널리스트 출신 범죄소설 작가 에이스 애트킨스. 트위터 @aceatkins 사진.

범죄 스릴러 소설이나 영화에서 형사와 사설 탐정(Private Investigator, PI)이 사이 좋게 지내는 예는 드물다. PI가 주인공이라면 형사는 심심찮게 조롱거리가 된다. 악당이거나 범인인 경우도 흔하다. 경찰은 직급이 높을수록 이미지는 더 나빠진다.

PI 주인공들은, 대개 ‘부패 없는 권력은 없다’는 생각을 품고 그 길에 든 냉소주의자거나 경험적 현실주의자들이다. 경찰(형사)은 정반대다. 그들은 세월과 더불어 점차 냉소와 자조로 마모되거나 부패로 굳어 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둘은, 그 허구의 세계에서는 기질적으로도 화합하기 힘들다. 그런 경향적 불화가 PI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된다.

PI에 우호적인 설정은, 약자를 더 편하게 편드는 심리적 경향에 편승한 면도 있겠지만 얼마간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할 테다. 미국의 한 현역 PI는 불화의 주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80년대 인기 드라마 ‘매그넘 PI’ 같은 걸 보며 성장한 탓에 PI들이 자기네보다 돈도 많이 벌고 이성에게 인기도 많으리라는 생각, PI 다수가 자질도 자격증도 없고 법ㆍ윤리 의식도 결여된 자들이라는 편견 혹은 경험, PI들 탓에 자신들의 게으름과 무능이 부각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곤 모든 경찰관과 형사들이 PI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내 경험상 깨어있고 자신감 있는 경찰들과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잘 지내 왔다”고 썼다.

여러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둘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는, 형사는 ‘사건’에 개입하는 반면 PI는 ‘문제’에 간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형사는 범죄를 해결함으로써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고, PI는 배우자 불륜서부터 납치ㆍ실종 등 형사사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사안에서 고객 즉 개인이나 개별 집단의 문제를 해소해 주고 보상을 얻는다. PI는 경찰과 달리 지시나 간섭 없이 일감을 고르고 조사를 진행하지만 법ㆍ제도적 권한이 얼마 없고 생활도 불안정하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튀어야 살 수 있는 이들이다. 1930년대 하드보일드 세계의 첫 주인공으로 꼽히는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같은 캐릭터로는, 현실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얘기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영문학과 대학원생 데이비드 페치하이머(David Fechheimer)가 유서 깊은 사설탐정회사인 핑커톤탐정사무소(Pinkerton Detective Agency) 캘리포니아 지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하던 1960년대 중반 무렵 PI의 이미지는 샘 스페이드나 요즘 소설 속 이미지와는 사뭇 딴판이었다.

60년대 핑커톤의 주 고객은 빨갱이 사냥과 노조 분쇄에 혈안이 돼 있던 주ㆍ연방 정부와 기업이었다. 즉 핑커톤의 탐정 다수는 좌파 색출을 위한 매카시즘의 촉수, 혹은 기업 노동운동의 와해를 위한 구사대의 수족이었다. 사실 1850년 출범 초기부터 핑커톤은 유사 관변단체였다. 주 업무 중 하나가 경비ㆍ경호여서 그들은 방대한 자체 사병 조직을 보유했고, 내전기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 무렵부터 그들은 노조 파괴의 최전선에 섰고, 20대의 대실 해밋도 1915~21년 핑커톤에 재직하며 노동 쟁의 와해공작에 부역한 전력이 있었다. 해밋의 소설을 읽고 샘 스페이드에 반해 충동적으로 핑커톤에 전화를 걸었다는 페치하이머가 처음 맡은 일도 어느 부두에 노동자로 위장해 침투하는 거였다.

학부를 마치고 영국 작가 제임스 조이스로 석사 논문을 쓰려던(sfchronicle.com) 페치하이머가 대실 해밋의 대표작인 ‘몰타의 매’를 펼쳐 든 것도 우연적 충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전에 작고한 해밋은 그 무렵 좌파활동가로 더 유명했다. 46년 그는 좌익 인권운동단체 시민권의회(Civil Rights Congress)의 뉴욕지부 의장을 맡아, 수감자 보석금 마련을 위한 CRC펀드 수탁ㆍ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49년 보석으로 풀려난 활동가 11명의 항소심이 기각됐는데, 그 중 4명이 감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도주했다. 해밋은 수정헌법 5조를 방패 삼아 그들 4명의 도피를 도울 수 있는 펀드 후원자 명단 공개를 거부해 법정모독죄로 투옥됐고, 53년 비미활동조사위원회(HUAC) 소환 조사에도 불응하며 버텼다. 페치하이머가 ‘몰타의 매’를 읽던 무렵 해밋의 모든 작품은 모든 공공도서관에서 퇴출된 상태였고, 학교는 베트남전 반대시위와 동맹휴업, 학교 측의 휴교령 등으로 수업 파행이 거듭되던 때였다. 그는 “시간은 많고 돈은 궁하던 때였다”고 94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nytimes).

“(책을 읽은) 다음날 곧장 핑커톤에 전화를 걸어 ‘경험은 없고 수염만 많은 사람 혹시 필요 없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바로 그날 수염 기른 사람이 필요하다더군요. 샘 스페이드처럼, 재미 삼아 한 2주 정도 해볼 생각이었어요.” 시간당 2달러를 받고 그렇게 시작한 일이 그의 직업이 됐다. 그는 내리 2년을 일하며 대학원을 자퇴했고, ‘샌프란시스코 PI의 전설’로 통하는 할 립셋(Hal Lipset, 1919~1997)의 조수로 채용돼 76년 독립할 때까지 실무를 익혔다. 립셋은 PI를 변호사들의 심부름이나 하는 ‘추잡한 염탐꾼(seedy gumshoe)’이 아니라 대등한 파트너로 일하는 전문직업인으로 격상시켰다는 평을 듣는 사설탐정이다. 그는 60년대부터 소형 전자장비를 활용한 도청ㆍ녹음ㆍ감시 기법을 익혀 일류 고객들만 상대했고, 미국서 부동산 가격이 가장 비싸다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하이츠의 방 25개짜리 맨션을 집 겸 사무실로 운영했다.

그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건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의회 조사위원회 검찰 측 특별조사원으로서 상원 정보소위원회에 출석, 칵테일 마티니의 올리브 속 도청기 성능을 시연해 보인 일 때문이었다. 그는, CIA나 FBI가 자신들의 비밀을 애써 감춘 것과 달리, 탐정으로서의 핵심 노하우 일부를 포기하면서 도청의 위력과 위험성을 그렇게 공개, 도청방지법 제정에 기여했다.

1976년 독립하던 무렵의 페치하이머와 그의 보스 할 립셋(오른쪽). 페치하이머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데는 당대 최고의 사설탐정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던 립셋의 덕이 컸을 것이다. 장남 자크 페치하이머 사진, 뉴욕타임스
1976년 독립하던 무렵의 페치하이머와 그의 보스 할 립셋(오른쪽). 페치하이머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데는 당대 최고의 사설탐정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던 립셋의 덕이 컸을 것이다. 장남 자크 페치하이머 사진, 뉴욕타임스

프리랜스의 일이 대개 그렇듯, PI도 실력 못지않게 일감 확보에 도움이 될 만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유명한 ‘사부’를 둔 덕에 페치하이머는 꽤 유리한 여건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76년 개업 첫해에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활동한 좌익 과격단체 ‘공생해방군(Symbionese Liberation Army)’의 은행강도 사건 주요 용의자 중 한 명인 페티 허스트(Petty Hurst)와 그의 연인 스티븐 솔리아(Steven Soliah)의 변호인단 조사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그는 주요 범행 증인의 증언이 신뢰하기 힘들다는 정황을 확보해 솔리아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기여했다.

그의 주요 고객들 중에는 60년대 반문화 활동가 겸 작가로 블랙 팬서스와의 연루 의혹을 받은 앤절라 데이비스, 부동산 재벌 로버트 더스트, 베트남전쟁 펜타곤 문서를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 미성년자 성폭행 등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2000년대 초 주식내부자거래 혐의로 기소된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역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NBA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 등이 있었다. 워싱턴DC 출신으로 탈레반 무장조직에 가담해 활동하다 2000년 체포된 존 워커 린드(John Walker Lindh, 1981~)의 변호팀 일원으로서, 린드가 소극적 가담자라는 진술을 얻기 위해 헬기까지 빌려 타고 파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통신마저 여의치 않던 아프가니스탄 전장 접경지까지 누비다가 린드가 2002년 7월 양형거래로 감형 없는 20년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뒤늦게 안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일 중에는 근사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그는, 중요한 것은 의뢰인의 이익이지 결백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공언하는 형사 변호사들의 직업윤리와 달리, 고객이 악한이든 아니든 희생자든 가해자든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사실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신이 캐낸 사실들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변호사나 고객들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 한 기자는 “한번은 내가 그에게 ‘피고의 동기가 돈이었냐’고 묻자 그가 ‘그보단 좀 더 셰익스피어적이었다’고 대답하더라”고 전했다. PI로서 그가 오직 사실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의 심정도 아마 ‘셰익스피어적’이었을 것이다.(nyt, 위 기사)

그의 활약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95년 실종된 국제 항공물류회사 DHL의 창업자 레리 힐브롬(Larry Hilbrom, 1943~1995)의 유산배분을 둘러싼 친자확인 소송이었다. 힐브롬은 95년 5월 사이판 파간(Pagan) 섬 인근서 수상비행기를 타다 기체와 추락해 실종됐다. 그는 독신이었지만, 알려진 바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현지 여성들, 특히 미성년자들과 성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부동산 등 유산 일체를 샌프란시스코주립대에 기부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사후 그의 친자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국적의 아이 8명이 나타났다. 공식적으론 자녀가 없던 터여서 유서에도 당연히 자녀 상속권을 박탈한다는 조항이 명시적으로 없었고, 그가 80년대 귀화한 사이판 민법은 혼외 자식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신이 없어 DNA 대조가 불가능했고, 사실상 은거 중이던 그의 어머니도, 형제들도 DNA 제공을 거부했다. 힐브롬이 쓰던 칫솔과 빗, 옷가지들은 이미 말끔히 치워졌거나 땅에 묻혀 시료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고, 욕조 배수관까지 염산으로 소독된 뒤였다. 아이들의 친자권 인정을 돕던 변호인단은 아이들 전원의 DNA를 확보해 그중 4명이 공통 인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법원을 압박했다. 결정적 돌파구를 연 게 페치하이머였다. 그는 교회 신도석에 앉은 힐브롬의 노모에게 접근한 뒤 자신이 파킨슨병을 앓아 몸놀림이 불편하니 헌금 봉투에 침을 좀 발라 달라고 청하는 방법으로 DNA를 확보, 분석 결과를 법원에 제시했다. 급기야 법원도 힐브롬 일가에게 공식적으로 DNA를 제공하도록 명령했다. 4명의 아이는 각각 5,000만달러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돈 해런(Don Herron, 오른쪽)은 1977년부터 샌프란시스코를 주무대로 대실 해밋의 문학기행을 이끌며, 장르 소설및 느와르 영화 평을 싣는 사이트를 운영해온, 해밋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할 립셋과 페치하이머(가운데)를, 샘 스페이드에 버금가는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리얼 디텍티브라며 애도했다. donherron.com
돈 해런(Don Herron, 오른쪽)은 1977년부터 샌프란시스코를 주무대로 대실 해밋의 문학기행을 이끌며, 장르 소설및 느와르 영화 평을 싣는 사이트를 운영해온, 해밋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할 립셋과 페치하이머(가운데)를, 샘 스페이드에 버금가는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리얼 디텍티브라며 애도했다. donherron.com

그의 스승이 PI의 위상을 제고했다면, 페치하이머는 PI의 전형을 재정의했다는 평을 들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책상 앞에 거들먹거리며 앉아 전 직장동료들에게 전화나 걸어대는 경찰출신 P.I 이미지, 혹은 잭 스페이드풍의 트렌치코트 차림에 권총을 차고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문 이들과, 외모서부터 업무 스타일까지 판이했다고 전했다. 스스로 밝힌 바 그는 “충분히 거칠지(mean) 못하고, 심지어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특기는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능력, 잘 듣는 능력이었고, 그게 PI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자 역량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조수로 일을 배워 대를 이어 PI가 된 장남 자크(Zach)는 “아버지는 증인들과 전화로 인터뷰하는 예가 없었다”고 말했다.

외모도 옷차림도 극히 평범하고 편한 옷을 즐겨, 법원 증언대에 서거나 클래식 콘서트 장에 갈 때도 어지간하면 면바지를 입곤 했다고 한다. 그도 스승 못지않게 성공한 P.I여서, 퍼시픽 하이츠에 집을 겸한 사무실을 두었고, 힐즈버그 별장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카르베네 소비뇽을 제조, 해미트의 첫 장편 제목인 ‘Red Harvest’란 이름의 상표를 붙여 판매하기도 했다.

또 한 명의 스승이라 할 만한 샘 스페이드에 대해 그가 한 평가도 셰익스피어적이었다. 그는 “샘 스페이드는 문학사상 최고의 사설탐정일지 모르지만 현실의 탐정으로선 형편없었다”고, “수수료 못 받기 일쑤고, 고객이랑 잠도 자고, 끝내 가난뱅이로 끝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년의 그는 힐브롬 친자확인소송의 팀 일원으로서 알게 된 ‘결백 프로젝트, Innocence Project’의 공동 설립자인 변호사 피터 뉴펠드(Peter Neufeld, 1950~)를 도와, 다수의 흑인 사형수 사건 재조사에 열정을 쏟았다. 페치하이머는 형사범죄 피의자들이 겪는 끔찍한 불이익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게 어떤 정치적 성향이 있다면, 결코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sfweekly.com) 뉴펠드는 “그는 인종, 전쟁, 삶의 조건 등에 관한 한 진보적 가치를 무척 중시했다”고, “고객들을 알고 삶의 조건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며 내게 시집들을 추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년까지 그는 ‘형편없는 탐정’ 샘 스페이드를 동경했다.

미 노동부 산하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5월 현재 미국에는 약 4만1,400명의 PI가 있고, 일인당 연평균 5만700달러(시간당 24.38달러)를 번다. 물론 편차도 크고, 세금 때문에 얼마간 축소 집계된 경향도 있을 것이다. PI의 평균 시간급이 86달러이고, 최대 200달러에 이른다는, 한 PI회사의 자체 조사자료도 있다. 반면 경찰 중 형사의 평균 연봉은 2018년 5월 현재 7만9,870달러다. 글로벌 경영컨설팅그룹인 헤이그룹(Hey Group)이 미국 700개 회사 14만5,000개 직종에 대해 조사한 바 2017년 대졸자 평균 연봉은 4만9,785달러였다.

PI자격 기준은 주마다 다르지만, 대개 고졸 이상 학력에 일정 기간 관련 경력을 쌓은 뒤 법규 등에 대한 필기시험을 이수하면 된다. 2016년 노동통계국이 향후 10년 직종별 성장 전망을 조사한 바, PI 시장 규모는 전체 평균보다 높은 11%포인트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측됐다. 지난해 말 한국 정부도 ‘민간조사원제도’ 합법화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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