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밀사와 밀정, 그리고 명도회
1796년 말 황심이 북경에 밀사로 떠나는 장면. 주문모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조선교회의 청원서를 비단에 써서 옷 속에 숨겨서 갔다. 탁희성 화백 그림
◇주문모 신부의 행보

1795년 5월 11일, 다산의 도움으로 계동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던 주문모 신부는 남대문 근처 강완숙 집 장작 광 속에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충청도 연산 땅 이보현의 집으로 은신했다. 당시 다산은 인근의 금정찰방으로 내려가 있었고, 주문모 신부는 이존창을 비롯한 이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엄격한 보호를 받고 있다가 1796년 5월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조선말을 익히고 조선 풍속에 익숙해지면서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과의 차츰 접촉면을 늘려갔다. 신부의 동선은 오로지 강완숙만 알고 있었다. 앞선 학습 효과도 있어서 신앙이 확실히 검증된 극소수의 교우들만 몹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일반 신자들은 신부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조선 정부가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음에도 이처럼 치밀한 조직 관리로 끝내 주문모 신부는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 시간 외에는 오로지 성직 수행을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 밤에는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주었다. 낮에는 천주교 관련 책자를 번역하거나 교리서를 썼다.

정조는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어서, 그를 공개적으로 체포하여 처형할 경우 양국간에 심각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이 점이 바로 한영익의 밀고 이후 이 시기 국가 문서에 주문모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이유다. 정조는 어떻게든 주문모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해서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 했다.

◇2년 만에 나타난 조선 밀사 황심

조선천주교회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이후, 북경 교회에 어떤 사절도 보낼 수가 없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자신이 파견한 주문모 신부와 소식이 두절되자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1795년 연말에 도착한 조선 사신단을 탐문한 결과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로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접했다.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가 이미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리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소식이 두절된 지 2년 만인 1797년 음력 1월 1일(양력 1월 28일)에 황심(黃沁) 토마스가 북경 성당에 나타났다. 그는 양반 신분이었지만 1796년 연말 동지사 일행 속에 마부로 위장 잠입해서 북경에 도착했고, 도착 직후 바로 북경 성당을 찾아 왔던 것이다. 그가 구베아 주교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입고 있던 솜옷 저고리를 벗더니 솔기를 조심스레 뜯었다. 그 안에서 얇은 명주천에 개미 같은 글자로 쓴 두 통의 편지가 나왔다. 하나는 1796년 음력 8월 14일에 주문모 신부가 라틴어로 쓴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한문으로 쓴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였다.

이 편지를 읽고서야 구베아 주교는 지난 2년 간 조선 교회에 불어 닥쳤던 검거와 탄압,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어떤 무관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한 사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상의 신주와 제사에 대한 북경교구의 보수적 지침이 조선 교우들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많은 장애를 초래했고, 양반 남성 신자들의 이탈을 야기했는지도 새삼 알았다.

조선 교회의 교인들은 편지에서, 포르투갈 여왕에게 공식 사절과 함께 수학과 의술의 지식을 갖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우호 조약을 맺고, 나아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원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1797년 8월 15일에 북경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Jean Didier de St Martin, 1743~1801) 주교에게 보낸 세 번째 서한에 아주 자세하다.

편지를 전한 황심은 충청도 덕산 용머리 출신이었다. 그는 이존창을 통해 입교한 뒤, 주문모 신부를 한때 피신시켰던 이보현에게 전교했고, 이보현의 누이와 혼인했다. 당시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갈 밀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신자들은 황심을 천거했다. 황심은 1795년 국경에서 주문모 신부를 기다렸던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1797년과 1799년까지 모두 세 차례나 북경을 다녀왔다. 성유(聖油)를 받아오고, 조선 교회가 북경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했다. 황심을 통해 단절된 북경과 조선교회의 연락망이 극적으로 복원되었다.

정약종이 회장으로 활동했던 명도회 교리서 집필 장면. 탁희성 화백 그림.
◇천주교 조직 내부로 스며든 밀정 조화진

북경으로 밀사가 오가는 사이에 정조는 주문모 신부의 조속한 검거를 위해 장용영(壯勇營)의 별군직(別軍職)을 시켜 몰래 기찰(機察)을 강화했다. 특별히 천주교의 위세가 대단했던 충청도 내포 인근의 검속을 강화했다.

1798년 12월 1일 정충달(鄭忠達)을 충청병사에 임명한 당일의 일이다. 정조가 하직 인사 차 들린 정충달에게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를 들자 곁에 서 있던 한 사내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했다. “두 번 세 번 자세히 보아, 훗날 만나더라도 그의 얼굴을 꼭 기억하도록 하라.” 정충달이 충청도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조화진(趙和鎭)이었다. 그는 청교(靑橋) 조씨의 서출(庶出)로, 정조에게서 천주교도 색출의 밀명을 받고 내려온 밀정이었다.

그는 이후 붓 매는 필공(筆工)이나 행상 행세를 하며 이 지역 천주교도의 집을 들락거렸다.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천주교도인 체했다. 가는 곳마다 묵어 자면서 교인들의 실태를 지역별로 자세히 기록해, 연락책이었던 음성 현감 노숙(盧橚)에게 비밀문서로 보고했다. 노숙은 조화진의 보고에 따라 천주교도를 체포해 가면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화진도 함께 붙들어 갔다가 뒤로 놓아 주는 술수를 부렸다. 이 때문에 천주교도들은 조화진이 밀고자란 사실을 한동안 꿈에도 몰랐다.

1798년과 1799년 두 해 사이에만 조화진의 밀고로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교회 측에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조화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에 1801년 신유사옥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조화진을 물고 들어가, 그 또한 여러 달을 감옥에 갇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밀정인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으므로 달리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는 결국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달아 자살했다. ‘벽위편’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

‘사암연보’에는 1799년 10월에 그 조화진이 다산 자신과 이가환을 무고한 일을 적었다. 충청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비밀 공문으로 조화진의 무고 편지를 보고했다. 정조는 자신이 파견한 조화진의 보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산과 이가환에 대한 내용을 무고로 규정하고 그 편지를 대신들에게 회람시켰다. 편지 중에는 과거 주문모 신부를 밀고했던 한영익 부자가 천주교 신자가 된 이야기까지 들어있었다. 정조는 주문모를 밀고했던 한영익이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무고임이 증명된다며 불똥이 다산에게 튀는 것을 한 번 더 막아주었다.

◇교회를 지키려는 눈물 겨운 노력

갈수록 신부와 신자의 접촉은 더욱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신부는 바깥으로 다닐 수가 없었다. 주문모 신부는 1799년 무렵, 북경의 신도 조직의 예를 본떠 명도회(明道會)라는 교리 조직을 결성했다. 지도자급에게 천주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각 지역 거점별로 체계적인 신심과 교리를 전파하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초대 명도회장에는 다산의 형인 정약종이 임명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회합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할 지도자를 임명했다. 모임에서는 남녀를 구분했다. 명도회 또한 대단히 비밀스럽게 운영되었다. 이 조직의 노출은 곧바로 교회 지도부의 와해를 뜻했다. 거점별 지도자들은 매달 극소수의 회원에게 주보(主保) 성인의 표식을 나눠주었고, 회원들은 그것을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여들었다. 몇 년 뒤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검거되어 국문을 받을 때 말한 명도회 조직의 운영 방식은 이랬다.

“서교에는 명도회가 있습니다. 3, 4명 또는 5, 6명으로 한 모임을 이룹니다. 먼저 이름을 신부에게 등록한 뒤에 신공(神工)을 합니다. 신공이란 것은 천주학을 살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1년 동안 신공을 부지런히 한 사람이라야 명도회에 가입이 허가됩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자는 퇴출됩니다.”

명도회는 모두 6곳으로 나눠 집회를 가졌다. 이를 6회(會)로 불렀다. 여섯 장소는 홍필주와 홍익만, 김려행, 현계흠, 황사영, 그리고 김이우로 추정되는 사람의 집이었다. 중간급 지도자 양성을 위한 소규모 공동체 조직을 운영했던 셈인데, 이 같은 방식은 조직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신부의 입만 쳐다보던 신자들이 명도회의 체계적인 가르침과 교재에 따라 교리를 이해하고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복음 전파를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정약종은 명도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였다. 정약종은 명도회 조직을 좀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한글로 쓴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천주교 교리서를 정리했다. 2책 분량으로 매 항목마다 제목이 붙고, 그 제목을 설명한 내용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상책에 32개, 하책에 11개의 항목을 두었다. ‘천주가 아니 계신 곳이 없느니라’ ‘천주는 삼위(三位)시고 일체(一體)시니라’와 같은 제목 아래 핵심 교리에 대한 쉬운 설명이 나오고, 중간 이후로는 ‘불경에 천당 지옥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의논함이 다 모르고 한 말이라’와 같이 불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차이를 설명한 내용이 여럿 있다. 하편에서는 예수의 강생과 부활, 재림을 말하고 천주교의 교리를 듣는 대로 즉시 믿어 받들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맺었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조선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서로 공인했다.

여성 조직은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던 강완숙이 총회장을 맡았다. 그녀는 대장부 같은 당찬 기질과 결단성으로 당시 천주교회 내부의 여러 복잡한 문제를 도맡아 감당했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고, 주문모 신부를 그녀가 살고 있던 전동의 양제궁(良娣宮)까지 데려가서 입교시킨 것도 그녀였다. 그녀들은 명도회의 회원으로까지 활동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같은 활동의 결과로 주문모 신부 입국 전에 4,000명 정도였던 천주교 신자는 당국의 지속적인 검거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9년 무렵에는 1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겉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교회는 중국에 밀사를 파견하고, 임금은 교회에 밀정을 심었다. 막전과 막후가 다 치열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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