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의 신탁상품이 진화하고 있다. ‘믿고 맡긴다’는 의미의 신탁은 은행이 예금ㆍ부동산 등 고객 재산을 맡아 관리한 뒤 일정 시점에 지정된 수익자에게 돌려주는 금융서비스다. 은행들은 필요나 목적에 따라 상품 설계가 자유로운 신탁 상품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범죄피해자 구조금 관리, 미세먼지 저감 등의 공익형 상품이나 반려동물 보호 등 이색 상품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신탁시장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범죄피해자 보호에 신탁 활용
KEB하나은행은 지적장애가 있는 살인사건 생존 피해자 A(25)씨를 위해 공익 사단법인 온율과 금융권 최초로 ‘범죄피해자 지원 신탁계약’을 체결했다고 13일 밝혔다. 범죄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받은 ‘구조금’을 피해자나 유족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중은행이 관리해 주는 첫 사례다.
하나은행에 따르면 지적장애 2급인 A씨는 지난해 10월 어머니를 잃었다. 조현병을 앓던 오빠 B(29)씨가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것. A씨도 119에 신고를 하려다 B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A씨는 범죄로 사망하거나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 또는 유가족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범죄피해 구조금’ 1억여원을 받았다.
문제는 지적장애가 있는 A씨가 홀로 구조금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고자 검찰, 온율, 하나은행이 머리를 맞댄 끝에 A씨가 구조금을 올바르게 쓸 수 있도록 관리하고자 신탁계약을 맺었다. 하나은행은 신탁된 구조금을 관리하면서 10년간 매달 A씨에게 생활비를 지급한다. 온율은 후견 기간인 3년 동안 피해자 생활을 돕고 목돈이 필요할 땐 구조금 사용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구조금 사용 내용과 지출 계획은 검찰에 보고된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구조금이 온전히 피해 회복 용도로 쓰일 수 있도록 신탁이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앞으로도 신탁계약을 통한 범죄피해자 지원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다채로운 신탁의 변신
그동안 신탁은 자산가들이 세금을 줄여 재산을 상속하는데 활용하는 상품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은행권에서 신탁은 필요에 따라 여러 서비스를 접목해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탁상품은 금융당국에 사후신고를 하면 돼 사전인가를 받아야 하는 예적금보다 상품구성이 자유롭다”고 말했다. 신탁시장 성장 속도도 빠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 신탁계정 자산(수탁고)은 2015년 말 160조4,771억원에서 지난해 말 249조2,009억원으로 3년 새 55% 늘었다.
국민은행은 미세먼지 저감 활동을 유도하는 상품 ‘KB맑은하늘공익신탁기부형’과 ‘KB맑은하늘신탁보수감면형’을 지난 3월 출시했다. 매달 최소 10만원 이상을 은행에 맡기는 감면형은 고객이 대중교통 및 친환경자동차 이용, 승용차 요일제 참여 등 미세먼지 저감 노력을 한 경우 연 1.2%인 수수료를 최대 0.6%포인트 감면해준다. 최소 가입금액이 500만원인 기부형은 은행이 받는 수수료의 10%를 고객 명의로 기부해 사회복지시설의 노후 보일러 교체에 사용된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두 상품의 신탁실적이 총 700억을 넘을 만큼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이 은행은 반려동물 시장 확대에 따라 주인이 사후 반려견을 돌봐줄 부양자를 미리 지정하고 사육에 필요한 자금을 설정하는 상품도 판매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1월 고객이 유언장을 남기지 않더라도 신탁계약을 통해 사후재산을 지정한 공익단체 등에 기부할 수 있도록 한 ‘유언기부신탁’ 상품을 선보였다. 고객이 수탁자(은행)에 금전을 신탁하면서 생전엔 본인을 수익자로 하고 사후엔 귀속권리자(기부처)에게 신탁재산을 승계하는 구조다. 이혼소송 급증에 따른 양육비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신탁(하나은행)이나, 자산을 은행에 맡겨 매달 연금으로 수령하다 사망 시 생전 지정한 곳에 남은 자산을 기부하는 상품(우리은행)도 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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