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1975)는 1925년 프랑스 파리 폴리스 베르제 극장에서 상연한 모리스 블랑쇼의 연극 ‘낮의 광기’로 블랙 아메리카 신드롬을 일으킨 흑인 댄서 겸 가수다. 한동안 도시 전체가 그의 출연 소식을 알리는 극장들의 홍보 포스터로 도배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가난한 세탁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부와 베이비시터로 돈을 벌었고, 13살 무렵 집을 나와 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백인 가정에서 베이비시터로 일할 때 “아이에게 절대 입맞추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고, 쥐가 들끓는 지하실에서 지내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을 흔들며 춤을 익혔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보드빌 극단을 따라 다니며 춤과 노래와 코러스를 익혔지만, “너무 여위고 너무 검어서” 무대에서 돋보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에게 프랑스는 기회의 땅이었다. 프랑스 비평계는 큰 키에 야윈 몸매, 날렵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의 춤사위에 매료됐다. 그의 공연은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갔다. 31년 가수로도 데뷔, ‘내겐 두 애인이 있어요(J’ai deux amours)’란 노래도 히트시켰다. 그에게 두 애인이란 조국 미국과 새 조국 프랑스였다. 하지만 그의 36년 미국 공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공연 리뷰 기사에서 그를 ‘Negro Wench(검둥이 여인)’이라 칭했다.
그는 모두 4차례 결혼했고, 3번째 결혼으로 프랑스 국적을 선택했다. 4번째 남편인 오케스트라 단장 주 부용(Jo Bouillon)과는 47년 결혼해 함께 12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지서 입양한 그 남매를 그는 ‘무지개 부족(Rainbow Tribe)’이라 불렀다.
50년대 이후 그는 미국의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글과 강연 등에 힘을 쏟았다. 1973년 그의 뉴욕 카네기홀 관객들은 36년과 달리 기립 박수로 그를 환영했고, 그는 그 무대에서 울었다. 1951년 미 흑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뉴욕지부는 5월 20일을 조세핀 베이커의 날로 지정, 매년 카퍼레이드 등을 펼친다.
그는 2차대전 레지스탕스 정보원으로, 여성항공보조대 장교로 활약한 군사적 공로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는 75년 4월 뇌출혈로 숨졌고, 프랑스 정부는 장례식에서 21발의 조총 사격으로 그를 추모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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