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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컨드 게스와 판단기준

입력
2019.05.1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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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만취녀 대응법. 유튜브 캡처
경찰의 만취녀 대응법. 유튜브 캡처

최근 신고를 받고 출동한 남자 경찰관이 자신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는 만취한 여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쩔쩔 매고 있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왜 그랬을지 짐작은 간다. 그 경찰관은 자칫 성추행이나 성희롱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을 바라보면서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투운동 이후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경직된 메시지를 던진 측면은 없는지 말이다.

몇몇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기껏 구해줬더니 보따리 물어내라고 하는 사회가 된다면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 미덕은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한 의도로 남을 돕는 과정에서 피해를 야기했다면 이를 면책해야 한다는 ‘선한 사마리안’ 법리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기인질범이 인질을 죽이겠다며 머리에 총기를 겨누는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관이 총을 쏴 인질범의 발을 맞춰 인질을 구출했다 하자. 그런데 문제는 인질범의 총이 장난감 권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총을 쏜 경찰관을 처벌이나 징계해야 할 것인가. 만일 그를 벌한다고 한다면 향후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경찰관들은 혹시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신속하고 소신 있는 법집행을 주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결코 공동체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기업의 경제활동에서도 마찬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기업의 경영자가 나름 합리적인 경영 판단에 의거해 100억원을 투자했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다고 하자. 회사에 100억원의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기업인을 배임죄로 처벌해야 할 것인가.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 결과만을 가지고 해당 기업인을 배임죄로 처벌하게 되면 사회전체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 경영판단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의 논거이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결과론만 가지고 처벌하면 소신 있고 과감한 투자 결정이 위축될 것이고, 이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손해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미국의 판례에서는 사후적 판단(second-guess) 금지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 위험방지 업무와 같이 급박한 결단이 필요한 분야에 있어서는 사후적으로 확보된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A라는 방안을 선택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라고 설사 판명된다 하더라도 행위 당시의 시점에 A가 아닌 B라는 방안을 선택한 사람을 벌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법을 운용할 경우 위험방지 업무 자체를 기피해 버리는 복지부동 현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한 며느리가 그릇을 깼다고 나무라면 며느리들이 아예 설거지를 하려 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실화가 바탕이 된 미국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조사관들은 새떼의 습격을 받고도 왜 곧바로 회항하지 않았느냐고 기장 톰 행크스를 집요하게 다그친다. 조사관들은 사후적으로 당시의 상황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톰 행크스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허드슨강 불시착은 자신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라며 자신이 처벌되면 어느 기장이 분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소신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정책당국자들은 법이나 정책을 추진하기에 앞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행동을 선택하도록 메시지를 던지는지, 바둑으로 치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정책적 혜안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당장 보이는 결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더 크고 중요한 그림을 놓치는 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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