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수여단 입구엔 박희도가 세운 동상… “5ㆍ18 北 조종” 망언 쿠데타 주역
육참총장 등에 철거 요청했지만 묵살… “국방부, 내란 잔재 청산 뒷짐” 비판
5ㆍ18 민주화운동이 39주년을 맞는 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계엄군의 자취, 그리고 이들을 지휘했던 신군부의 위세는 세월의 거센 물살에 온전히 씻겨갔을까. 정쟁에 발이 묶여 출범조차 못 하고 있는 5ㆍ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오늘, 그리고 현장 발포 명령자들에 대해 실현되지 않고 있는 법의 정의. 사실 1980년 광주의 상흔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음이다.
무고한 시민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겨눴던 군의 지난 39년의 시간도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흘러간 듯하다. 신군부를 권좌에 앉혔던 1979년 12ㆍ12 쿠데타의 주역, 그리고 5ㆍ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명령했던 주동자의 잔재가 심지어 1980년 5월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부대들에까지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39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군은 5ㆍ18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을 기리는 조형물 청산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를 요구하는 내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3공수여단에 우뚝 선 쿠데타의 상징
경기 이천시 마장면에 위치한 특수전사령부와 3공수여단으로 통하는 출입문. 이곳에선 매일 아침 12ㆍ12 쿠데타의 주역으로 내란죄 유죄가 확정된 박희도 전 특수전사령관이 세운 동상이 군인들을 맞는다. 3공수여단은 1980년 5월 광주로 투입됐던 공수부대 가운데 하나다.
특전사 정신을 강조한 이 동상의 머릿돌에는 ‘박희도’의 이름 석 자가 보란 듯이 새겨져 있다. 박희도씨는 12ㆍ12쿠데타 당시 1공수여단장으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1980년엔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던 기관 중 하나인 26사단을 이끌며 전두환 정권을 지탱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5ㆍ18은 북한의 조종”이라고 말하고, 지난해 말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골프를 함께 쳤다. 3공수여단은 특수전사령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아 특전사령부와 한 울타리를 쓴다. 박희도씨가 만든 동상은 특전 장병들의 심장인 특전사령부 쪽 출입문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전사와 3공수여단으로 출입하는 지금의 군인들에게까지 호령하는 듯하다.
같은 군부지 안쪽에는 12ㆍ12 내란 주동자이자 199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씨의 말씀 또한 조형물로 새겨져 설치돼 있다. 3공수여단에서 최근까지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최영철(31)씨는 지난해 육군참모총장과 특전사령관에게 “범법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군대 내에 상징으로 있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며 철거를 요청했으나, 4월 전역 때까지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3년, 그의 말씀을 담아 전남 담양의 11공수여단 정문 앞에 세워진 부대 이전 준공 기념석은 36년만에 옮겨졌다. 11공수여단은 5ㆍ18 당시 광주에 투입돼 가장 잔인한 진압을 벌인 부대로 악명 높다. 하지만 3공수여단ㆍ특전사 조형물에서 보듯이 국방부가 군 내부에서 내란 주역들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는 최씨에 대한 인터뷰와 별도의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5ㆍ18 당시 광주 투입부대들의 조형물과 문구, 설치자 등을 확인했다.
문제의 조형물을 보면, 특전사령부 출입문 조형물(동상)은 특전 장병의 모습을 형상화 했고, 동상 하단에 특전장병신조가 적혀 있다. 내용은 ‘①짧은 내 인생 영원히 조국에 ②용자에겐 승리 겁자에겐 죽음이 ③훈련은 강하게 전투는 번개같이’이다. 동상 뒷부분의 머릿돌에는 ‘1982. 3. 5 특전사령관 중장 박희도’가 새겨져 있다. 이 출입문은 특전사령부뿐 아니라 3공수여단 장병들도 함께 이용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 말씀을 새긴 같은 부대의 조형물은 ‘충성 한가닥에 목숨을 건다’(앞면), ‘귀신같이 접근하여 번개같이 쳐라’(뒷면)라는 내용이다. 하단에 ‘대통령 각하께서 특전부대 재임시 부대원의 신조로 제정하신 뜻을 여기에 새겨 전 장병의 지표로 한다’라며 ‘1992년 8월 14일 사령관 중장 김 형선’으로 기록돼 있다.
16일 이전되기 전까지 11공수여단의 정문을 지킨 준공기념비(타원형 원석)의 문구는 ‘先進祖國의 先鋒(선진조국의 선봉)’이며 ‘大統領(대통령) 全斗煥(전두환)’이 함께 새겨져 있다. 설치자 직함은 1179부대장, 설치연도ㆍ날짜는 1983년 5월 12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씀을 부대장이 전달하는 형식의 내용인 셈이다. 1179부대는 11공수여단의 통상명칭(특징을 감추기 위해 무작위 번호로 부여한 부대명)이다. 앞서 14일 광주시와 국방부, 5월 단체 관계자들은 이 준공기념비를 광주 서구 5ㆍ18자유공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념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계엄군의 전승기념비 성격으로 건립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고, 5월 단체는 이 기념비가 5ㆍ18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역사적 상징물이라고 보고 이전을 요구해왔다.
한국일보가 조형물 정보공개 청구를 한 5개 부대는 3ㆍ7ㆍ11공수여단, 20사단, 31보병사단이다. 5ㆍ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부대들이다. 이들 부대의 일부 조형물의 경우, 군이 설치연도나 설치자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알려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조형물은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 또 군 전체로 확대할 경우, 12ㆍ12 및 5ㆍ18 무력진압 주동자들을 기린 군 부지 조형물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육군, 내부 문제 제기 묵살
현재 의정부성모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일하는 최영철씨는 올해 4월 25일 전역할 때까지 3공수여단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군 시절 내란 주역인 박희도씨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말씀을 전하는 내부 조형물들이 불편했다. 최씨는 지난해 10, 11월쯤 당시 김용우 육군참모총장과 조영진 특수전사령관(직무대리)에게 이 조형물들을 폐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씨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 인트라넷의 ‘육군참모총장과의 대화’ ‘특전사령관과의 대화’ 코너를 이용해 글을 남겨 요청했다”며 “하지만 제대할 때까지 약 6개월간 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범법자를 기리는 비석이 군대 내에 상징으로 있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쿠데타나 국민을 살해한 주역이 만든 것이 출퇴근 때 항상 보는 곳에 있는 건 부적절하다. 없애달라”는 요지로 요청했다고 말했다. 특전부대는 간부급들이 많아 90% 가량 부대 밖으로 출퇴근을 하는데, 그 출입문에 내란 주역이 만든 동상을 세워 날마다 보도록 하는 것은 군인정신이나 군 기강을 위해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씨는 “군 복무 중에 2016년 특전사령부와 3공수여단이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서 경기 이천으로 옮겼는데, 문제의 동상 등을 새로운 부지로 그대로 가지고 와 출입문에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부지에 재설치는 사실상 군이 과거 청산에 대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줘 더 큰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최씨는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군 기강을 의심할 만한 불편한 발언들도 들었다. 훈련 가던 중 차 안에서 한 간부가 “삼청교육대를 다시 만들어서 다 잡아 넣어야 한다” “사회가 지저분하다” 등의 발언을 했다. 함께 6,7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또 술자리에서 농담식이긴 했지만 “전 장군(전두환) 있을 때가 좋았지”라는 위험한 말도 들었다고 한다.
국방부는 내란 주역들의 ‘말씀’들을 기리는 군 내부 조형물에 대한 입장을 요구하자 “향후 5ㆍ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해 관련 내용들에 대한 조사 착수 시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답했다. 폐기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국방부는 전 군을 대상으로 내란 및 5ㆍ 18 무력진압 주역들이 만든 조형물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이에 대한 조사나 청산작업을 계획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담당자가 출장 중이라 확인할 수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최영철 군의관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시스템상 지휘관과 글을 작성하는 사람 외에는 열람이 불가하다”며 “당시 지휘관은 약 5개월 동안 특수전사령관 직무대리를 수행한 후 전역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도 전역하여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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