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렘브란트의 ‘야경’: 야경국가 대 복지국가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렘브란트 ‘야경’(164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363㎝ x 437㎝

플랑드르(Flandre) 화파의 대가로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를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뭐니 뭐니 해도 ‘야경(夜警)’이다. 1642년에 그린 대작으로 ‘빛의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별칭에 걸맞게 빛에 의한 명암 대비가 뚜렷하게 표현되고 있다.

야경이라는 제목은 원래 렘브란트가 붙인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제목은 그림 내용과도 맞지 않는다. 렘브란트가 붙인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였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도시에는 시민대라는 일종의 경찰단이 있었는데, 이러한 자위대는 156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다.

 ◇배경은 대낮인데 ‘야경’이라 불린 이유 

더구나 부대 출동 장면의 배경도 밤이 아니라 낮이다. 그렇다면 대낮에 출동하는 자경대(自警隊)를 그린 그림이 왜 야경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렘브란트 자신의 독특한 화풍에 기인한다. 그것은 명암의 대비다. 그의 화풍의 특징은 화면에서 중요한 부분은 강조하기 위해서 밝게 표현하고 배경이 되는 주변은 어둡게 채색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이 같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생생하게 나타난다.

렘브란트가 죽은 후에 이 그림의 소유자들은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니스 칠로 덧칠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더 어둡게 변색되어 마치 밤처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 작품은 ‘야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림 배경이 원래부터 밤이었던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림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은 복원작업을 하게 된 1975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작업을 하다가 덧칠했던 니스가 벗겨지자 본래의 채색이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전체적으로 훨씬 밝은 색조를 띄고 있었다. 비로소 작품 배경이 밤이 아니라 낮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부대의 출동 장면을 그린 그림의 한가운데에 소녀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소녀 때문에 이 그림이 암스테르담의 ‘화승총부대’가 출동하려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녀의 허리에 매달린 닭의 발톱이 그림을 주문한 화승총부대의 심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렘브란트는 이 부대가 실제로 출동했던 역사적 사실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당시 네덜란드에 유행하고 있던 집단초상화로 그려진 것이다. 소녀는 이 그림이 화승총부대의 집단초상화라는 것을 상징하는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야경이란 국가가 국민들에게 치안과 재산권 보호를 위해 야간에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이다. 그리고 이 같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세금의 징수로 운영되는 국가가 바로 야경국가이다. 이처럼 야경국가는 치안 유지와 개인 재산권 보호가 가장 주요한 임무이고 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들로부터 최소한의 조세를 징수하여 운영하는 ‘최소국가’의 형태이다.

 ◇정부 개입 최소화한 야경국가 

일찍이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정부적인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통해서 거대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홉스적인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서는 개인의 모든 행위에 어떠한 외부적 규제나 제약조건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아나키(anarchyㆍ무정부 상태)에서는 자연자원에 대해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어떠한 행위도 강제할 외부적 제약이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자원에 대해서 각 개인이 어떠한 권리라도 소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의 열악하고 카오스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강력하고 독점적인 권력을 가진 국가조직과 일종의 계약관계를 맺게 되며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람들은 각자 개인적 후생을 아나키적 상황에서보다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가 상정한 국가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고 국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거인(Leviathan) 같은 국가이다. 국민들은 국가와의 계약으로 개인적 자유가 어느 정도 유보되고 국가조직을 운영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해야 하지만, 정부가 사적 재산권과 활동을 보호해 주는 데에서 얻는 이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기꺼이 이러한 사회적 계약에 동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라는 명저에서 경쟁적 시장 모형을 이용하여 개인의 재산권 획득과 거래의 자유를 보호해주는 제도로서 최소국가의 출현을 정교한 이론체계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 개인은 각자가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해야만 하는데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연합체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방어를 위해서 경호인들을 고용하는 경우도 생기며, 이 과정에서 방어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보호 서비스업체는 한 지역에 여러 개가 생겨 서로 경쟁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일정한 지역 안에서 단 하나의 보호업체만 남게 될 수도 있다. 즉 개인의 소유권을 보호해 주는 사적인 보호 조직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고 이 조직들 간에 자유로운 경쟁을 통하여 독점적 지위를 획득한 하나의 기구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사설 보호 조직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체제로의 진화과정은 야경국가로 이행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곧 노직이 명명(命名)한 바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극소(極小)국가(Ultra-minimal State)이다. 여기에다가 어떤 지리적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이를 통해서 보호와 강제 서비스를 수행하고 그 독점적 조직을 유지해나가는 재정을 확보하게 되면, 극소국가의 조직은 보다 발전된 최소국가(Minimal State)의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야경국가의 모습이고 이러한 국가는 구성원들의 경제적ㆍ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약을 최소화하며 그들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초기 근대국가의 형태는 정부의 역할이 대단히 작고 최소한도의 비용으로 유지하는 야경국가(Night Watch State) 조직에서 출발되었다고 본다.

 ◇복지국가, 그 도약과 한계 

이러한 최소국가에서는 개인적 생산 활동과 재산권의 확보 및 유지는 최대한도로 보장되므로 세금 부과는 국가 기능을 최소한도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낮은 수준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사회적 부의 불평등은 심화될 수 있으나, 이러한 불평등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부의 세습을 차단하려는 개혁적 개량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최소국가의 정부 역할은 너무 작다고 여겨진다.

최근 북구 복지국가들의 형태를 보면, 국가란 개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최대한도로 노력하는 조직이다. 국가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정부의 제1목표는 국민 복지와 후생의 증진에 있는 것이다. 이들 복지국가의 문제는 국민들의 이상적 후생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막대한 세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지수준이 높아질수록 세금 부담률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국민경제에서도 정부의 비중은 커지게 되고 민간 부문은 위축되게 된다. 아울러 세금부담 증대는 민간부문의 생산성을 약화시키고 실업을 증대시킬 수 있으며 점차 경제성장은 둔화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구의 여러 나라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렘브란트는 평소에 가난과 싸워야 할 만큼 그리 어려운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고 주문이 끊이지 않아 상류사회에 걸맞은 화려한 생활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났으며 1669년 사망했을 때에는 묘지를 살 돈도 남기지 못해 무연고 묘에 쓸쓸히 묻혔다. 무일푼에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 렘브란트 입장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는 복지국가에서 보다 안락한 임종을 맞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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