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관련 사건에서 조직적 증거인멸 혐의가 잇따라 문제가 되고 있다. 검찰 수사를 받는 SK케미칼의 가습기살균제사건에 이어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사건에서 실체적 진실을 덮기 위한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재벌 오너 등 수뇌부로 향하는 불길을 막기 위한 의도적 방화벽이라는 지적이 비등한 가운데 증거인멸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와 증거인멸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송경호)는 8일 삼성그룹의 보안을 책임지는 삼성전자 보안선진화 태스크포스팀(TF) 서모 상무와 그룹 현안을 조율하는 사업지원 TF 소속 백모 상무에 대해 증거인멸 및 증거인멸 교사 등의 혐의를 적용,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들은 삼성바이오와 삼성바이오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 등에서 이뤄진 증거인멸 행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삼성 측은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앞둔 지난해 직원들의 휴대전화와 컴퓨터 등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JY’나 ‘합병’, ‘미전실’ 등 단어를 검색해 관련 자료를 삭제했다. 검찰은 이 같은 조직적 증거인멸을 서 상무와 백 상무가 지휘하는 등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파악했다
증거인멸은 현행법상 5년 이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범죄 행위를 규명할 핵심 자료 등을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한다면 수사단계에서 구속은 면할 수 없다. 증거인멸 지시를 받고 실행만 한 경우라도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 수위가 올라갈 수도 있다.
가습기살균제 유해성 자료를 은폐한 혐의를 받는 SK케미칼 관련자들 또한 역할과 기여도에 따라 구속여부가 갈렸다. 증거인멸을 지시한 박철 부사장은 구속됐지만, 같은 혐의로 함께 영장이 청구된 임원 3명에 대해서는 ‘피의자의 지위 및 역할, 관여 정도’ 등을 고려해 기각됐다.
특히 증거인멸 과정에서 윗선의 범행을 규명할 핵심 자료 등이 훼손돼 복구가 불가능해졌다면 구속은 물론, 기소 후 처벌 수위 또한 높아질 수 있다. 신연희 전 강남구청장의 횡령 관련 증거를 인멸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징역 2년의 확정형을 받은 강남구청 김모 과장의 경우도 항소심 재판부가 “인멸된 증거가 회복되지 않아 신 전 청장의 범행행위 규명을 어렵게 한 점을 고려할 때 실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재판부는 또 신 전 구청장의 지시가 있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서버 담당자 등에게 증거 삭제를 지시한 김 과장이 증거인멸 과정에서 ‘자유로운 의사’를 가진 것으로 판단했다.
법조계에선 모범을 보여야 할 대기업이 조직적으로 범죄를 은폐했다는 점에서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위 조사가 착수되면 자료를 삭제ㆍ은닉하는 등 조사방해를 서슴지 않았던 대기업의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정위 조사 방해 행위에 대해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이 일자 국회는 2017년 과태료 처분에 머물렀던 처벌 수위를 형사처벌(2년 이하 징역)로 끌어 올리는 방식으로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대기업의 증거인멸 행위는 조직적인 범죄 은폐 행위로서 죄질이 좋지 않다”며 “일벌백계 차원의 엄벌을 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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