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침기부 종횡표의 위력 
'목민심서'에는 곡산의 이동리와 강진의 남당리를 각각 하나씩 예로 실려 있다. 침기부종횡표 남당리의 예시. 정민 교수 제공
 
 ◇정당에 내걸린 곡산 지도 

곡산부사 부임 직후 다산의 잇단 선정(善政)은 백성들의 신망과 기대를 한껏 높였다. 다산은 자리를 잡자마자 고을 지도의 제작을 지시했다. 그것은 10리 단위를 약 20㎝ 길이로 환산해 그린 가로 세로 2m가 넘는 큰 지도였다. 읍성(邑城)을 그리고 산과 시내의 형세를 그린 뒤, 그 속에 들어앉은 마을을 그렸다. 마을에는 가구 수 대로 지붕을 나타내는 △표를 그렸다. 10집 사는 마을에는 △표 열 개를 그렸고, 산 아래 외딴 집에도 △표 하나를 그려 넣었다. 기와집에 푸른색을 칠하고, 초가집에는 노란색을 칠하자, 마을의 경제 형편까지 눈에 보였다. 도로는 붉은색, 산은 초록색, 물은 파란색을 칠했다.

지도를 작성할 때 실정에 밝은 노련한 아전 몇을 불러 다짐을 두었다. “이는 백성의 성쇠를 파악하는 기본 자료다. 사실과 다른 정보를 담아서는 안 된다. 대충해서도 안 된다. 마을이 커서 파악이 어렵거든 그곳 면장에게 물어서라도 반드시 사실과 일치해야 한다.”

지도가 완성되자 그것을 정당(政堂)의 한쪽 벽 전체에 내걸었다. 각 마을의 이름과 거리, 마을 별 주택의 숫자, 초가집과 기와집의 비율까지 색깔 별로 칠해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전체 고을의 규모와 형세가 한 눈에 들어왔다. 관장이 정당에 앉아서도 전체 고을을 손금 보듯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공문서를 보내고 심부름꾼을 보낼 때 지도만 보면 왕복 소요 시간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곡산 고을 전체가 다산의 손 안에 들어왔다.

 ◇위력적인 침기부종횡표 

다산은 다시 일처리가 민첩하고 재빠른 아전 몇을 따로 조용히 불렀다. “이제는 가좌책(家坐冊)을 만들 것이다. 송나라 때 이른 바 침기부(砧基簿)라 한 것이 이것이다. 침기부는 각 가호 별로 토지와 자산을 미세한 것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다. 호적 대장이 있지만 실상과 맞지 않아 엉망이다. 여기서 백골징포(白骨徵布)니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니 하는 갖은 폐단이 생겨난다. 호적은 해묵은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번에 작성하는 침기부는 사실과 한 치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침기부는 남송 때 이춘년(李春年)이 각 가호별로 전지(田地)와 택지(宅地)를 등재해 조세와 균역(均役)을 매기는 기초 자료로 삼았다는 문서다. 실물은 남은 것이 없다. 다산은 그가 침기부를 작성했다는 기록만 보고, 조선의 상황에 맞춰 침기부 양식을 새로 만들었다. 세금 징수를 위해 아전들이 만든 엉터리 장부는 있었어도, 침기부는 다산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조선 500년간 어떤 목민관도 만든 적 없던 특별한 장부였다.

다산이 고개를 갸웃하는 아전들에게 가로 세로로 칸이 쳐진 표 하나를 내놓았다. 마을별로 한 장씩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가로 칸에는 세대주의 이름을 쓰고, 세로축에는 품(品), 세(世), 객(客), 업(業), 역(役), 택(宅), 전(田) 등 무려 19개 항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표 아래에는 작성 지침까지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품은 양반은 사(士), 양민은 양(良), 중인은 중(中) 등으로 신분을 적었다. 세는 그 마을에 자리 잡은 지 몇 대 째인지를 적게 했다. 객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왔을 경우, 온 곳과 이곳에 옮겨 와서 산 햇수를 적었다. 택은 집이 몇 칸인지 기록했다. 10은 열 칸 짜리 주택이란 뜻이고, 2는 부엌 하나에 방하나 딸린 두 칸 짜리 극빈자 주택을 의미했다. 기와집은 숫자 앞에 ‘와(瓦)’를 추가했다. 전은 ‘10일’은 열흘 갈이 토지를 뜻하고, ‘10석(石)’은 2백 마지기를 뜻했다. 휼(恤)에는 구휼 대상인 과부, 홀아비, 고아를 표시하게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 수와 군역과 세금 관계, 자녀와 노비의 숫자, 가난한 집은 심지어 솥의 개수까지 적게 했다.

 ◇표 한 장에 한 마을이 들어가다 

빈 표를 받은 아전들이 안 그래도 바쁜데 언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호구 조사를 한단 말인가 싶어 긴 한숨을 푹 내 쉬었다. 다산이 말했다. “각자 할당된 마을로 가서 이 표를 채워 오너라. 만에 하나 사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너희에게 죄를 엄중하게 묻겠다. 내가 이를 만드는 까닭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서가 아니다. 백성들을 성가시게 할 뜻도 없다. 백성의 수령이 되어 그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함이다. 이 뜻을 알려 백성들이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아전들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자, 다산이 다시 말했다. “나는 앞으로 이 장부를 믿고 백성의 일을 처리할 것이다. 사실과 맞지 않으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이끌겠는가? 반드시 정밀하게 작성해야 한다. 어느 날 산촌 사는 백성이 들어와 송사할 경우, 나는 너희가 작성한 침기부에 따라 신문할 것이다. 장부에 거짓된 내용이 들어있다면 탄로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너희에게 죄를 묻겠다. 지난 번 김오선의 일처럼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내가 직접 그곳에 가서 조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때 백성의 가옥 수를 헤아려 이 장부와 맞지 않으면 너희에게 죄를 묻겠다. 조사할 때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도 안 된다. 직접 가거라. 촌백성의 말만 듣고 그대로 받아 적어도 안 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출장비는 따로 줄 것이다. 마을에 가서 닭이나 개를 잡아오게 하거나, 잡비를 거두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내가 따로 탐문해 볼 것이다.” 아전들이 움찔해서 그제서야 대답이 크게 나왔다.

이전에도 가좌부(家坐簿)는 고을마다 있었다.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 조사를 할 때마다 가좌부를 작성하곤 했다. 하지만 매 가구마다 수십 줄이나 되는 내용을 복잡하게 적어서 책자가 온 방에 가득 찰 지경이어서 실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산의 침기부 종횡표는 한 집의 핵심 기록이 표 한 줄에 다 들어가서 한 마을의 형세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다산은 곡산 고을 전체에서 마을 단위로 작성된 종횡표를 구역 별로 나눠 모두 12권의 책자로 묶어, 자신의 책상 아래 늘 놓아두었다.

 ◇남당리 리포트 분석 예 

‘목민심서’ ‘전정(田政)’ 조에 침기부 종횡표의 실제 예시가 2건 수록되어 있다. 곡산 시절 서쪽 고을 이동리(梨峒里)와 강진 남쪽 변두리 마을인 남당리(南塘里)를 예로 든 것이다. 지면의 제약이 있으므로, 9세대로 구성된 남당리의 침기부 종횡표를 통해 마을 현황을 분석해 보자.

신분으로 보면 사족(士族)이 세 집, 양민이 네 집, 중인이 한 집, 사노비가 한 집이다. 양반인 윤세문과 윤세무는 이 마을에 7대째 살아온 터줏대감이다. 이름으로 보아 둘은 형제간이다. 윤업도 윤세문 등과 한 집안으로 보인다. 양민 4호는 말이 양민이지 생활 형편이 말이 아니다. 이억동은 홀아비요, 하조이는 과부, 그리고 오이재는 맹인이다. 구휼 대상이다. 세 사람이 사는 집은 초가 2칸이다. 방 한 칸에 부엌이 달린 집이랄 것도 없는 움막이다. 손희운은 양민이라도 직업이 장사꾼이어서 다섯 칸 짜리 초가에 산다. 고창득은 중인으로 교생(校生)이다. 형편이 그 중 낫다. 10칸 집에서 산다. 사노비인 백노미는 2년 전 광주에서 이사 왔다. 대장장이 일을 한다. 1남 1녀를 두었다. 이 마을에서 윤세문 형제는 절대적 위치에 있다. 윤세문은 스무 칸 기와집에 살고, 논이 20마지기다. 소가 두 마리, 말도 한 마리가 있다. 현금이 천 냥 가량, 사내 종과 계집 종이 각각 넷씩이다.

표를 잠시만 들여다봐도 그 마을의 정황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다산은 소송 사건이 벌어지거나, 세금 관련한 탄원이 들어오면 잠자코 침기부를 꺼내 미리 살핀 뒤에 심문을 진행했다. 다음은 위 표를 바탕으로 ‘목민심서’에서 가상적 설정으로 예를 든 내용이다.

“남당리 사는 대장장이 백노미가 그 마을 양반인 윤업에게 고소를 당했다. 백노미가 대장일을 해서 만든 농기구를 여러 번 빌렸는데, 윤업이 삯을 안 주었다. 백노미가 삯을 달라고 조르자 괘씸하게 여겨 다른 구실을 붙여 그를 고소한 상황이었다. 다산은 윤업을 부른다. “백노미는 광주에서 이사 온지가 고작 2년이다. 너희 윤씨는 씨족이 번성하니, 그를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의 농기구를 여러 차례 빌려 가고도 삯을 안 주어 백노미가 너를 원망하고 있는데, 정작 고소는 그대가 한단 말인가?” 윤업은 아전에게 뇌물을 주어 사전 작업을 해놓은 터라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다가 관장의 족집게 같은 나무람을 듣자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제 잘못을 인정해야 했다.

한번은 향갑(鄕甲), 즉 면장이 군정(軍丁)의 명단을 올리면서 장애인까지 끼워 넣었다. 다산은 미리 침기부를 살펴본 뒤, 즉각 이렇게 꾸짖었다. “아무개는 근자에 다른 지역에서 이사 왔다. 게다가 그는 홀아비에다 다리 병신인데 어떻게 군포(軍布)에 넣는단 말인가?” 힘없는 백성을 짓밟아 농간을 부리려던 향갑은 그 한 마디에 깜짝 놀라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다산의 침기부 종횡표는 이렇듯 현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새 부사가 구석진 작은 마을에 불구자가 언제 이사 온 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아전이나 향갑들은 고을 전체를 손금 꿰듯 훤히 아는 부사의 예리한 지적 앞에 그 동안 관행처럼 해오던 가렴주구의 버릇을 버렸다. 분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해오던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다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침기부를 기준으로 호적을 재정리하게 했다. 가구 수가 늘고 준 것을 직접 작성하자 간사한 아전이나 이들을 등에 업고 못된 짓을 자행하던 자들이 손 쓸 곳이 없게 되었다. 이로써 대번에 고을의 기강이 확실히 잡혔다.

다산은 1797년 윤 6월 22일에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1799년 4월 24일에 병조참지에 제수되어 곡산을 떠났다. 5월 5일에 동부승지로 옮겼다가 하루 만에 형조참의로 보직이 변동되었다. 변방소를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도성을 떠난 지 근 2년만의 복귀였다. 2년 가까운 곡산 재임 기간 중에 다산은 중앙 관서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지방 행정의 허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이 경험이 훗날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의 저작으로 이어졌다. 다산은 어느새 38세의 중후한 나이였다. 정조는 변함없이 다산을 따뜻이 반겨 맞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 주문모 신부를 중심으로 놀라운 기세로 교세를 확장한 천주교의 그늘이 다시 다산을 옥죄어 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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