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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극우는 망령이 아니다

입력
2019.05.0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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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극우정당 '복스'의 산티아고 아바스칼 대표가 28일 치러진 총선 직후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복스는 이번 총선에서 득표율 10.3%의 성적을 거둬 24석을 확보했다. 스페인에서 극우정당이 의회에 진입하는 것은 1975년 프랑코 군사독재 정권 종식 이후 44년 만에 처음이다. 마드리드=AP 연합뉴스
스페인 극우정당 '복스'의 산티아고 아바스칼 대표가 28일 치러진 총선 직후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복스는 이번 총선에서 득표율 10.3%의 성적을 거둬 24석을 확보했다. 스페인에서 극우정당이 의회에 진입하는 것은 1975년 프랑코 군사독재 정권 종식 이후 44년 만에 처음이다. 마드리드=AP 연합뉴스

“○○○는 보수(保守)도, 우파(右派)도 아니야. 그냥 수구(守舊), 극우(極右)일 뿐이지.”

살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접한다. 전자와 후자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고자 굳이 국어사전을 뒤적이는 수고를 감수할 필요까진 없겠다. ‘보수, 우파’의 앞에는 ‘건전한, 합리적’이란 수식어가, ‘수구, 극우’의 뒤에는 ‘꼴통’이라는 말이 각각 생략돼 있다고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에는 ○○○를 ‘말이 통하는’ 상대방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기보단, ‘대화할 필요조차 없는’ 또는 ‘절대로 용인해선 안될’ 존재로 여기는 경멸의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를 극우라고 일컫는 개인이나 단체를 본 적은 지금껏 없는 것 같다. 타인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든 말든,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수주의자’ 정도로만 표현한다. ‘극우’라는 시니피앙(significantㆍ기호 이론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소리를 가리키는 개념)이 내뿜는 위험하고 음습한 아우라 탓일 것이다.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게 바로 극우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치러진 스페인 총선 결과를 전한 주요 외신들의 헤드라인은 대략 이랬다. “사회당이 선거에서 이겼고, 극우(far-right)는 플레이어로 등장했다”(AP통신), “극우의 약진... 스페인 사회당, 총선 승리”(BBC방송), “스페인 총선, 좌파를 띄우고 극우 경고음을 울리다”(뉴욕타임스). 중도좌파 소수 정부를 이끄는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사회노동당(POSE)이 제1당(전체 350석 중 123석)으로 올라섰다는 점과 함께, 2013년 창당한 극우 정당 복스(Vox)가 24석을 얻어 원내 진출에 성공한 사실을 핵심 키워드로 꼽은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중도좌파 정당이 실패를 거듭하는 와중에, 스페인 사회당의 이번 승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극우의 돌풍’이 같은 비중으로 다뤄진 데엔 이유가 있다. 일단 스페인에서 극우 정당이 의회에 발을 들이는 건 1975년 프랑코 군사독재 종식 이후, 44년 만에 처음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좀 더 범위를 넓히자면 보다 근본적인 배경이 존재한다. 서구 사회에 퍼져 있는 극우에 대한 뿌리 깊은 경계심이다. 이는 주로 국가주의ㆍ국수주의 형태를 취하는 극우 이데올로기가 정치 체제로 현실화했던, 그 결과 인류사에 크나큰 불행을 안긴 ‘부끄러운 과거’에 기인한다. 다름아닌 독일 나치 정권,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얘기다.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준 극우의 속성은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개인보다 집단, 곧 국가를 앞세우고(전체주의), ‘우리’의 결속을 위해 특별한 근거 없이 ‘적’을 만들어 내며(배제ㆍ억압의 정치), 이를 통해 절대권력을 추구한다(힘의 숭배).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증오와 혐오의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러니까 2015년쯤부터 반(反)난민 기류 등에 힘입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는 극우의 물결에 이제는 무뎌졌을 법한데도 서방의 주류 정치권과 언론이 계속해서 우려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 반성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쨌든 유럽 극우 정당의 급부상은 결국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기성 우파 정당들에게서 등을 돌린 탓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정치 환멸’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 않은 한국에선 왜 극우 정당이 힘을 쓰지 못하는 걸까.

궁금증은 ‘패스트트랙 정국’에 대처한 자유한국당의 모습을 보면 이내 풀린다. 그들의 현실 인식, 투쟁 구호 등을 봤을 때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의 차이점을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극우의 목소리를 한국당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는 뜻이다. 중도 우파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극우와는 절대로 손을 잡지 않겠다”며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의 연정은 한사코 거부했던 그 모습을 한국의 자칭 ‘정통 보수정당’엔 기대해선 안될 듯하다. 한국 정치판에서도 극우는 망령(亡靈)이 아니다.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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