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씨, 8년간 자료수집 연구 
 ‘조선왕실의 미용과 치장’ 책 내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어여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 어여머리는 조선시대 부인이 예장할 때 하던 머리 모양으로,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그 위에 가체로 땋아 만든 다리를 얹는 형태를 말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한 부잣집에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그는 ‘다리(머리숱이 많아 보이도록 덧넣은 머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시아버지를 맞으려 갑자기 일어서다 다리에 눌려 그만 목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저술 총서 ‘청장관전서’(1795)의 한 대목이다. 부유한 가정의 여성들이 수많은 다리를 머리에 얹고 비녀로 꾸며 그 무게가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는 내용이다. 머리 단장에 7만~8만냥(당시 초가집 수십 채 값)을 쓰는가 하면, 왕실에 다리를 공물로 올리는 백성들 사이에선 ‘머리카락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아우성이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지난달 30일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실에서 인터뷰 도중 왕실의 치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선임연구원이 최근 낸 연구서 ‘조선왕실의 미용과 치장’은 조선의 꾸밈 문화를 되짚는다. 한중연이 발행하는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시리즈(11권 예정) 중 6번째로 발행된 이 연구서는 이 연구원이 8년간 들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이 연구원은 “조선 왕실의 복식 외에 치장이나 화장 같은 세부 주제를 파고든 자료는 많지 않아 8년 전부터 차곡차곡 연구를 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화장, 이발법 등 미용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건 선조들의 노하우가 축적돼 온 덕”이라고 덧붙였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조선의 왕실 의례에선 머리 장식이 가장 중요했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재위하던 1602년 이후부터는 왕비, 왕세자빈의 가례에 모두 ‘수식’이 이뤄졌다. 수식은 남의 머리카락을 덧대고 장신구를 꽂는 머리장식을 말한다. 이 연구원은 “조선시대엔 존두(머리를 소중히 여기는)사상이 강했기 때문에 얼굴보다 머리카락을 얼마나 잘 가꾸느냐가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궁중에선 머리를 얼마나 풍성하게 할지, 어떤 장식을 꽂을지를 신분에 따라 달리했다”고 말했다.

영친왕비가 사용하던 다리. 여성들이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가발의 형태 중 하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머리카락이 주된 꾸밈 수단이 되다 보니 머리 높이를 최대한 올리는 고계(高髻)가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1749년(영조 25년) 기록에 따르면 궁중에서 머리카락을 사방 1척(약 30㎝)으로 높인 이가 있었을 정도다. 다리를 넣어 머리를 풍성하게 꾸미는 유행은 연산군 때 절정이었다. 연산군은 1502년 공주를 위한 의례에 쓴다는 이유로 다리 150개를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의친왕비 김씨가 위체(왼쪽)를 쓴 모습. 오른쪽은 어여머리를 한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지나친 고계 풍속은 사치로 변모해 각종 폐해를 낳았다. 이 연구원은 “다리는 제주 공물 중 하나였는데, 왕실에서 다리를 수시로 봉진하게 하니 백성의 불만이 상당히 커졌다”며 “그런데도 예조(의식, 제도 등을 관장하던 기관)에선 공물을 쉽게 줄여줄 수가 없다며 2년 동안만 다리 봉진을 감면하는 조치를 내려 공분을 샀다”고 설명했다.

왕실의 왜곡된 풍습은 양반가, 서민에까지 이어졌다. 머리에 얹을 가체(加髢)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인을 미루거나 혼인을 한 후에도 시부모에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영조는 1756년 양반가에 이어 이듬해 궁중의 부녀자들에게 가체를 얹지 말고 족두리를 쓰라는 가체금지령을 내렸다.

1918년 족두리를 착용한 궁녀들(왼쪽)과 순종 국상 때 첩지머리를 한 상궁들의 모습. 서울대박물관 소장ㆍ한국일보 자료사진

‘백옥 같은 피부’를 위한 화장 문화도 있었다. 왕실에는 화장품을 공급하는 기관 보염서가 궁 안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고급 연지나 분궤를 임금과 중궁전, 휘빈궁에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상궁 김명길의 수기를 모아낸 책 ‘낙선재 주변’에는 순종비인 순정효황후의 화장을 두고 ‘박(薄) 화장’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 듯 안 한 듯 분만 살짝 바르는 것’이란 뜻이다. 치장에 관심이 많았던 명성황후는 러시아제 화장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분합. 분과 분첩이 들어있던 당초문 진사 청화백자 합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많지는 않지만 ‘그루밍족’(미용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1719년(숙종 45년) 병조참의가 된 이세근이 대표적이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이세근은 날마다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목욕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뽑아 정리했다. 이 연구원은 “주변 사람들은 이세근을 인요(人妖ㆍ상식에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라 불렀는데, 그만큼 남성이 치장을 하는 사례가 흔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 일본, 중국의 치장 문화는 어땠을까. “머리 단장 문화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머리카락 자체를 주요 장식 요소로 삼아 ‘단정미’를 강조한 반면 중국은 머리에 쓰는 관에 진주와 보석을 많이 붙여 ‘화려미’를 뽐냈습니다. 일본은 옆머리를 최대한 높고 넓게 벌리고 빈 부분이 최대한 얇게 비치도록 머리를 빗어 ‘기이한 멋’을 냈고요. 최근 3개국 문화 특징과 여전히 비슷하지 않나요.”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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