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제2회 오청원배’ 이벤트 2점 접바둑 경기에서 4명의 여류 프로기사 참패
중국 커제 9단 및 한국 박정환 9단 등 세계 톱랭커들도 확연한 실력 차이로 연패
연구생들도 도장을 찾기 보단 AI에 의존하며 바둑 공부
지난달 30일 ‘제2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의 이벤트 경기로 열렸던 조승아(오른쪽) 2단과 중국 인공지능(AI)인 골락시의 2점 접바둑 대국은 바둑TV에서 생중계됐다. 바둑TV 캡처

지난달 30일, ‘제2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우승상금 약 8,500만원)가 열린 중국 푸저우(蒲州) 동호신세계호텔. 이곳에선 4명의 이 대회 출전 선수들과 ‘2019세계인공지능(AI)바둑대회’에서 우승한 골락시(싱천·星陣)의 이벤트 대국이 벌어졌다. 중국의 루이나이웨이(56) 9단과 왕천싱(28) 5단, 리허(27) 5단, 한국의 조승아(21) 2단 등이 2점(약 20집 가치)을 먼저 깔고 유리한 접바둑 형태로 진행됐지만 이날 치러진 모든 대국은 AI가 승리했다. 칭화대에서 만든 골락시는 현재 다른 팀에서 인수, 개발을 이어가고 있는 AI다. 그 동안 ‘AI vs 프로바둑기사’의 비공식 접바국은 이뤄졌지만 공개 대국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AI가 파죽지세로 바둑계를 접수하고 있다. 3년 전,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인간계 대표로 나섰던 이세돌(36) 9단에게 완승(4승1패)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AI의 영향력은 무서운 속도로 반상(盤上)에 흡수되고 있다.

이번 오청원배의 이벤트 대국에서 AI 바둑의 최정상급도 아닌 골락시에게 인간계 여류 기사 대표들이 당한 참패가 실질적인 사례다. 공인된 순위는 아니지만 바둑계에선 ‘알파고’와 중국 텐센트의 ‘줴이(絶藝)’를 AI 바둑계 1,2위로 꼽는다. 골락시는 미국의 ‘미니고’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올해 열렸던 세계AI바둑대회에 알파고와 줴이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벤트 대국이긴 했지만 반집(0.5집) 승부가 비일비재 한 인간계 프로바둑 대국을 감안하면 20집이나 등에 엎고 진행된 이번 오청원배의 이벤트 접바둑 대국 결과는 바둑계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다. 조승아 2단은 대국 직후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진 것이 가장 아쉽다"며 "골락시가 예상치 못한 수들을 많이 두어 와서 당황스러웠다"고 전했다.

사실, AI 바둑 실력은 이 보다 앞서 여러 차례 확인됐다. 지난해 1월,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커제(22) 9단은 줴이와 벌인 2점의 접바둑 인터넷대국에서 불과 77수만에 치욕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국내 프로바둑 기사들도 AI와의 격차를 실감해야 했다. 올해 1월 국내 온라인 게임 업체인 한게임에서 자체 개발한 ‘한돌’이 국내 랭킹 1위(5월 기준)인 박정환(26) 9단 및 신진서(19·2위) 9단, 김지석(30·3위) 9단, 신민준(20·4위) 9단, 이동훈(21·6위) 9단 등의 국내 최정상 프로기사들과 벌인 맞대결을 모조리 싹쓸이했다. ‘한돌’과 경기를 벌인 박정환 9단은 “(대국 중반 이후) 아쉬워서 계속 두어 봤지만 약점을 찾을 수 없었다”며 “상당히 두텁고 안정적이면서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복기했다. 한돌은 바둑 AI 가운데 5위 수준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AI의 파급력도 갈수록 배가되고 있다. 프로바둑 기사들 사이에서 AI는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포석 연구에서부터 전투와 수읽기, 형세판단은 물론 끝내기 단계까지, 모두 AI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최근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 또한 이구동성으로 “AI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올해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른 이호승(32) 4단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달 ‘제24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우승상금 7,000만원)에서 4강 진출에 성공한 이호승 4단은 “인공지능으로 약점인 포석을 공부했고 포석에서 안 당하게 되니 자신감이 생겼다”며 “부족했던 초반을 밀리지 않고 시작할 수 있다 보니 중반 전투에서도 힘을 내면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호평했다. 2013년 26세의 늦깎이로 프로 세계에 뛰어든 이호승 4단은 이 대회에서 박정환 9단과 신민준 9단, 이세돌 9단 등의 내로라 한 프로바둑 기사들을 차례로 꺾었다. 덕분에 이 대회 참가 당시 92위였던 국내 랭킹도 이달엔 84위로 끌어 올렸다.

AI는 바둑 연구 풍토까지 바꿔 놓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각 도장에 바둑 공부를 위해 찾아오는 연구생들이 AI로 인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한국기원 소속의 프로바둑 기사는 “AI의 등장으로 인해 예전처럼 도장에 가서 숙식까지 하면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며 “바둑계 풍토도 상당히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포츠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