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0> 79년 만에 찾은 김법린의 연설문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서 지적… 2006년 獨서 연설문 발견
김법린(왼쪽에서 세 번째) 선생이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릴 당시.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일본 공산주의자 가타야마 센, 이의경(필명 이미륵), 이극로 선생이 나란히 섰다.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제공

“일본은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장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거나, 도덕적 이상에 반(反)하더라도, 실현만 가능하다면 자신들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영토확장 자체가 가장 큰 재산이며, 모든 인간적 가치는 이에 의해 희생될 수 있습니다.”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궁전.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한 한국 청년의 유창한 프랑스어 연설이 궁 안에 울려 퍼졌다. 궁을 찾은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단의 이목이 이 청년에게로 집중됐다. 당시 28세 청년이자 4인의 한국 대표단 중 한 사람으로 연설에 나선 김법린(1899~1964) 선생의 목소리였다.

일본제국주의의 개념, 역사, 목표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정으로 점철된 식민통치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각종 구체 수치까지 적재적소에 소환하는 이 논리 정연한 연설은 30여분간 궁을 공명했다. 독립운동사의 주요 사건으로 기록돼 온 세계피압박민족반제국주의대회(이하 피압박민족대회) 한국 대표단 연설의 한 대목이다.

한국 대표단의 참석과 연설의 존재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연설의 전체 내용은 80여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국내에 전해지는 연설문 전문이 없었던 탓이다. 공동 참가했던 이미륵 선생이 배포한 인쇄물의 내용을 연설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던 터라 더 적극적인 발굴 노력도 이뤄지진 못했다. 자칫하면, 각종 통계와 반박 불가능한 사실관계를 근거로 제시하며 일제 식민통치의 불합리, 한국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폭로한 이 연설의 가치가 묻힐 뻔했던 것.

연설문 전문이 독일 브레멘의 한 고서점에서 포착된 것은 그로부터 79년이 지난 2006년 11월, 김법린 선생의 작고 42년 만이었다. 애국지사 조현균 선생의 현손이자 독립운동 연구자인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에 의해서다. 그가 80여년만에 연설문을 발견한 구체 정황과, 그 연설의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조 소장은 ‘일제강점기 유럽 유학생들의 행적’을 연구해 왔다. 그는 당초 이극로 선생의 연구를 위해 독일을 찾았다가 여러 자료를 입수했고, 프랑스에서는 김법린 선생의 자취방 건물터를 찾아 독립기념관에 제보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 여정 중 2006년 브레멘의 한 고서점에서 그의 눈에 띈 건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의 독일어 단행본이었다.

이 책에는 당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던 한국 대표단의 명단과 직책, 이 대표단의 결의안, 연설 전문이 수록돼 있었다. 누군가 독일어로 번역해 기록해 놓은 내용이었다. 원본을 찾기 위한 수소문이 계속됐고, 그해 1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 원문이 소장됐다는 사실을 확인해 그 내용을 확보했던 것. 김법린 선생의 연설 원고는 ‘킨파린의 연설문(texte de discours de Kin Fa Lin)이란 설명과 함께 보관된 채 조국 연구자의 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 소장에 따르면 킨파린(Kin Fa Lin)은 김법린 선생의 프랑스명 Kin Fa Ling의 독일식 오기로 추정된다. 원고는 A4 크기로, 표지를 제외하면 총 7쪽 분량, 프랑스어로 된 전문을 그대로 낭독할 경우 34분이 소요된다. 제목은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였다. 조 소장을 도와 주한프랑스대사관 공보과 심영섭 공보참사보좌관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김법린 선생의 프랑스 유학시절(단체 사진에서 복원) 모습과 광복 이후의 모습.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제공. 국가보훈처 제공.

번역된 연설문을 처음 받아 들고 분석에 나선 조 소장은 우선 그 구체성에 눈길이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는 “일제의 실체를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 각인시키고자, 한국의 교육 문제를 중점으로 연설을 펼쳤다”며 “(대외적으로 지속해 온) 일제의 억지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대며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일제 만행을 폭로하고, 각국 참가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설득한 점이 뛰어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연설은 서론(일본 제국주의 개념, 역사, 목표), 본론(불평등한 한일 관계의 역사 및 행정, 사법, 교육, 경제, 노동 정책의 각 실상), 결론(일제 정책은 가장 범죄적인 처벌 대상이라는 확인)으로 구성돼 그 구조가 매우 탄탄하다.

그는 특히 연설을 통해 일본 조선총독부가 발간하는 ‘연간보고서’가 얼마나 일제 참상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연설 일부를 보면, 한국의 발전상을 자랑하는 일제를 향한 반문을 제기하며, 심지어 일부 외국인들의 단편적인 진단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매섭게 지적한다.

“총독의 ‘연간 보고서’는 철저하게 파렴치한 위선으로 합병 이후 지속적인 한국의 발전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성공적인 행정을 자랑하였습니다. 또한 특정 부류의 외국인들이 내놓은 표면적인 관찰 결과는 순진하게도 공식 보고서의 일부 사실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이 20년 전 한국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중략) 스스로 통치를 했더라도 다른 현대적 국가들이 해외무역의 증가와 산업에 과학을 접목시켜 발전하듯이 한국도 발전하지 않았을까요?”

이어지는 연설에서는 행정, 사법, 교육, 경제, 노동 정책의 각 실상을 구체적으로 폭로한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지닌 총독이라는 직책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어 “(총독은) 일본 의회 앞에 책임이 없으며 천황에게만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기관은 전혀 없다,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소리를 내려는 일본 또는 한국 신문들은 모두 정간되거나 다른 주인에게 매매됐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군사 정신으로 무장한 채 한국에 힘을 과시했습니다. 모든 공무원들은 일본군의 것과 구분이 안 되는 정복을 착용하고 칼을 차야 합니다. (중략) 그러니 420년 동안 위대한 도덕적 문화 속에서 생활했던 평화적이고 정직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수도 없는 끔찍하고 더러운 폭력적 상황들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교육 문제를 두고는 “1917년 관보를 살펴보면 (한국 내) 한국인을 위한 공립학교의 수는 526개로서 주민 3만1,650명당 한 곳인데(당시 인구는 1,664만8,129명), 일본인을 위한 학교는 367개고 일본 주민 874명당 한 곳꼴이었다(일본 주민 수는 32만938명)”며 어떻게 일제가 한국인 대상 고등교육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지적해 나가는 식이다. 모든 교육이 일본어로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연설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회가 영국 제국주의 규탄을 중심으로 흐르면서, 주요 의제가 중국, 인도, 이집트 문제에 집중됐고 한국의 문제는 집행부에 의해 다소 소홀히 다뤄졌다. 조 소장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학생들이 뜻을 모아 함께 일제 규탄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당시 대회에서는 한국 대표단의 결의안이 마련된 것도 큰 의미”라고 분석했다. 한국 대표단이 만든 결의안에는 “3ㆍ1 독립선언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일제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불교계의 간곡한 청으로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한 김법린 선생은 불교계 주역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수감돼 옥고를 치르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법린 선생의 손자인 김태연 우리삼텍 대표가 할아버지의 평전 속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늘 시민사상의 확립, 불교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김법린 선생은 귀국 후 범어사에서 승려들과 함께 학생들을 대상으로 야외 수업을 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곤 했다. 김혜영 기자

지난달 22일 만난 김법린 선생의 손자 김태연 우리삼텍 대표는 “할아버지 업적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뒤늦게 연설문 전문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아 독립운동을 하신 게 진짜였구나’ 싶었다”고 반겼다. 그는 광복 이후, 또 작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김법린 선생의 서훈이 이뤄진 적이 없는 것을 보며, 때로는 어린 마음에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게 혹시나 과장은 아닐까’하거나 ‘더 훌륭한 분들이 워낙 많아서일까’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에라도 연설 관련 자료를 정리해두셨을 법한데 없는 거잖아요. 한편으로 성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해요. 집안에 전해지는 경구가 ‘상송결조 수월허금(霜松潔操 水月虛襟)’이에요.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자신을 돌아보고, 물에 담긴 달처럼 마음을 비우고 타인을 대하라는 의미죠.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인지 본인의 업적을 돌아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으셨대요.”

광복 이후 조선불교 총무원장, 제3대 문교부장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동국대 총장 등을 지냈지만 1964년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본인의 공로나 치적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 실제 생전엔 서훈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작고 후 31년이 흐른 1995년에 이르러서야 김법린 선생의 서훈이 이뤄지지 않은 점을 이상하게 여긴 한 동국대 소속 연구자의 신청으로 뒤늦게 서훈이 이뤄졌다는 것.

“할머니가 할아버지께 왜 그러냐고 여쭤보면 늘 그러셨대요. (독립운동 활동이) ‘집에 도둑이 들어서 도둑을 잡자고 다 같이 애쓴 것뿐인데, 뭘 그걸 가지고 야단 떠느냐고’요. 그런 분이라서인지 해외에서 할아버지 연설이 발굴됐다고 하니 정말이구나, 싶고 반갑더라고요.” 김 대표는 집안의 장손으로 김법린 선생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고, 각종 박물관과 소장처에 내어주는 일을 도맡고 있다. 그는 “친일을 하고서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자기 공 내세우기 바쁜 시절을 묵묵히 통과하신 할아버지의 엄격함, 지성이 집약된 연설문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며 “귀국 이후로도 범어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조선어학회에 가입해 활동해 오신 것을 보면 그만큼 시민 사상, 지적 토양을 바로 세우는 게 독립에 필수적이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편으로 드는 안타까운 마음에 더해 당부도 전했다. “알면 알수록, 그 감시가 삼엄한 일제 강점기 동안 국제사회에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린 일대 사건이 그간 과소평가돼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할아버님처럼 선열들께서 겸손하셨기에 이렇게 과소평가돼 있는 독립운동의 장면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 사회가 이념대립의 질곡에서 빠져나와, 서훈 여부는 차후로 두더라도 더 많은 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연구에 힘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관련기사 다시 부르는 3월의 노래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