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미국 텍사스주 해안의 상류에 있는 갤버스턴만에선 정유공장 등이 쏟아낸 물질이 환경을 오염시키면서 이곳에 살던 송사리의 일종인 ‘걸프 킬리피시’ 개체수가 급감했다. 당시 멸종위기까지 몰렸던 걸프 킬리피시는 현재 갤버스턴만에서 번성 중이다. 이 작은 물고기는 어떻게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 남았을까.
미국 베일러대ㆍ캘리포니아대ㆍ컬럼비아대ㆍ인디애나대 공동 연구진은 걸프 킬리피시의 흥미로운 진화에 대한 답을 이달 3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내놨다. 이들은 걸프 킬리피시의 유전체(유전자 전체)를 해독한 결과, 걸프 킬리피시가 몸 안의 아릴 탄화수소 수용체(AHR) 신호를 억제할 수 있는 유전적 특징을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평소 세포질 밖에 있던 AHR은 환경오염 등의 영향으로 활성화하면 세포 안으로 들어가 아릴 탄화수소 핵 전달체(ARNT)와 결합, 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비정상적으로 촉진해 세포를 손상시킨다. 걸프 킬리피시는 이 때문에 심장 기형이 생긴다. 현재 번성 중인 걸프 킬리피시는 과거엔 없던, AHR 활성화를 막을 수 있는 ‘유전적 저항성’을 갖고 있다.
이 저항성은 놀랍게도 갤버스턴만에서 2,500㎞나 떨어진 곳에 서식하는 대서양 캘리피시로부터 왔다. 멸종 위기로 치닫던 중 걸프 킬리피시는 인간 활동의 영향으로 우연히 갤버스턴만까지 진출한 대서양 킬리피시를 만나 짝짓기를 했다. 이로 인해 대서양 캘리피시의 AHR 관련 유전인자가 걸프 킬리피시로 전해졌고, 걸프 킬리피시가 오염된 물에서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연구진은 “걸프 킬리피시는 개체수가 많아 높은 수준의 유전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새로운 유전형질까지 갖게 되면서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며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유전적 다양성과 유전자를 교환하는 이종교배가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유전자가 섞인 ‘잡종’이 급속한 환경 변화에 따른 멸종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유전적 다양성의 바탕이 되는 생물다양성은 세계 곳곳에서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5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세계 세 번째 규모인 빅토리아 호수의 생물다양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IUCN에 따르면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빅토리아 호수 유역에 서는 고유종 204종 중 76%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에 걸쳐 있는 이 호수 유역은 나일강의 주요 수원이다. 앞서 유엔(UN)은 2010년 ‘제3차 세계 생물다양성 전망보고서’를 통해 “서식지 감소와 환경오염, 기후변화 등으로 생물종 감소 속도가 자연 상태에서보다 1,000배 빨리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생물종 하나가 사라질 경우 그 동물을 먹고 사는 동물은 개체수가 줄고, 해당 동물이 먹이로 삼는 동물은 개체수가 늘게 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는 특정 생물군의 유전적 다양성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걸프 킬리피시처럼 다른 종으로부터 새로운 유전형질을 획득할 가능성도 줄이면서 수많은 생물을 멸종 위기로 내모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엇비슷한 개체만 있을 경우에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기근’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일 감자 품종만 재배하다가 특정 질병이 유행해 모든 감자가 죽는 바람에 감자가 크게 부족해졌다. 이른바 ‘바나나 멸종설’이 나오는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에선 새로운 곰팡이질병이 발생해 확산될 경우 바나나가 쉽게 멸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재배되는 바나나가 모두 ‘캐번디시’라는 단일 품종이기 때문이다.
걸프 킬리피시 연구를 진행한 앤드류 화이트헤드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유전적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도록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미래에 일어날 급격한 환경 변화를 이겨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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