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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판사들의 각성과 그 수혜자들

입력
2019.05.02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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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자리한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자리한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떤 선진국도 검사의 조서로 재판하지 않는다.”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은 현대판 멍석말이다.”

인권운동가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가 했을 법한 이 발언들. 알고 보면 사법농단 국면에서 전ㆍ현직 법관들이 검찰 조사나 공소유지를 지적하며 한 말들이다.

사법농단 사태로 전ㆍ현직 법관들이 줄줄이 소환당하고 기소되는 동안, 법원에선 특이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별안간 피의자와 피고인의 인권 보장이나 수사ㆍ재판의 절차 문제가 화두가 됐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전직 고위법관의 소환 직후, 밤샘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같은 법원 다른 부장판사는 검찰의 이메일 압수수색이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아 위법이라 주장했다. 또다른 부장판사는 기소도 안 된 법관을 카메라 앞에 세우는 검찰을 성토했고, 전직 사법부 수장은 “공소사실만 드러나야 할 공소장에 재판부의 예단을 일으킬 불필요한 주변 사실이 적혀 있다”(공소장 일본주의 위반)고 문제 삼았다.

이들 전ㆍ현직 법관들은 사법농단 수사를 계기로 ‘큰 각성’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검찰의 횡포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주장이다. 판사인 자신들조차 이럴진대, 국민들은 얼마나 속절없이 검찰에 당하고 있을까 하는 한탄도 있었다.

법관들의 때늦은 각성은 이해는 가면서도 한편으론 실망스럽다. 지적을 했던 이들이 대부분 수십년 경력 고참 법관이었다는 점에서 실망은 더 크다. 이들이 더 일찍 이 사실을 깨우쳤다면, 이들 앞에 섰던 그 수많은 피고인 중 상당수는 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법대(法臺)에 올라앉아 보던 세상은, 검사실 접이의자에 앉아 목격한 세상 혹은 동료들이 참담한 모습으로 검찰청 앞에 섰을 때 보이는 세상과 물론 달랐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심각성을 모른다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큰 설득력은 없다. 이들이 지적한 문제점들은 지금껏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억울하다며 하소연했던 것들이고, 변호인들이 잘못된 관행이라 입이 닳도록 문제 삼은 일들이자, 시민단체 등에서 줄기차게 개선을 요구해 온 과제들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성을 타박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막 오른 이 논쟁의 끝을 어떻게 맺을까다. 몇몇 법관의 성토에서 출발한 법원의 각성은 실제 위력을 발휘 중이다. 법원은 전직 대법원장 공소장이 범죄사실과 관련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절차에서 빡빡한 잣대를 들이댄다. 전직 대통령 소환 때도 꿈쩍 않던 검찰은 포토라인 폐지를 검토 중이다.

기본권 보호를 최고 사명으로 삼는 법관들이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이나 잘못된 조사 관행을 지적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제기가 검찰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친정 식구들을 챙기는 수준에서 끝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 역시 떨치기 어렵다. 판사들이 당하고서야 이뤄진 각성이기에, 판사들이 당하지 않는 태평성대가 또 온다면 문제의식은 다시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시작된 논쟁이라면, 이참에 근본적이고 장기적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판사가 엮이지 않은 형사사건에서도 공소장 문제를 적극 지적하고, 영장 발부 취지와 달리 수집된 증거를 철저히 배제하며, 밤샘수사에 시달린 피의자가 진실과 다른 진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상기했으면 한다. 그래서 판사들이 기소되며 시작된 각성의 과실을 국민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법원이 이렇게 정말로 국민 편에 선다면 검찰도 스스로 달라질 것이다. 친정 식구를 바라보던 안타까운 심정을 일반 피고인에게도 투영하는 지점에서, 떨어진 사법부의 신뢰를 다시 일으킬 첫 계기를 찾게 될 지도 모른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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