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시간과 싸우는 사람들] <3> 한국전쟁 북파공작원들 
백영필(앞줄 맨오른쪽)씨가 1954년 인천 한 다방 앞에서 첩보부대 동기들과 함께 서있다. 백영필씨 제공

북파공작원은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이들이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분단체제의 최전선에서 피 흘려 싸운 이들의 존재는 오랜 세월 동안 부정당했다. 휴전 66년을 맞아 종전을 거론하는 시대가 왔지만, 노병들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들의 존재를 지웠던 국가가 이제 와서는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를 입증해보라며 명예 회복 및 보상에 뒷짐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료는 하나 둘 사라지고 증언할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가를 위해 피 흘려 싸웠다”는 이들의 자부심도 함께 흐릿해지고 있다.

 ◇"특수임무 중 총탄 맞았는데 특수공작원 아니라니" 

1952년 경기 개풍군 중면 동강리. 첩보 수집을 위해 중공군 출몰지역에 잠복 중이던 육군첩보부대(HID) 장단분견대 대원들에게 기습적인 박격포, 기관총 공격이 가해졌다. 대원 백영필(86)씨는 “후퇴하라”고 외치다 집중사격 대상이 됐고, 오른쪽 등과 가슴을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동료들은 개울을 건너다 의식을 잃은 그를 대문짝에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했다. “혁대에 선짓국 같은 피가 흥건했다”고 기억하는 그의 가슴팍에는 지금도 총탄이 빠져나간 상처가 움푹 패어있다.

백씨는 17살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향인 신의주를 떠나 마냥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미8군정보연락장교단 간부를 만나 육군첩보부대 민간인 특수공작원이 됐다. 정보학교에서 2주 교육을 마친 뒤 1951년부터 경기 파주시 장단면 등지에 파견됐다. 백씨는 “1951년 7월 판문점 회담장소 주변을 4번 습격해 중공군 8명을 생포했다”면서 “인민군, 중공군을 생포해 첩보를 입수하는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다”고 떠올렸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 육군첩보부대에 정식 입대해 14년 뒤 제대하기까지 숱한 표창장도 받았다.

하지만 60여년이 지나 그의 각종 공훈은 국가로부터 부정당했다. 2011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라며 보상금 지급을 거부한 것이다. 위원회는 “첩보부대에서 근무한 사실은 인정되나 주둔지역인 경기 개풍군이 아군과 적군의 완충지대였다”면서 “적지에서 위험 임무를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불복한 백씨는 소송을 냈다. 당시 전쟁 상황을 나타낸 한미 군사 지도 등을 근거로 “1951년 당시 아군 방어선은 임진강 이남에 구축됐다”면서 “특수임무를 수행한 임진강 이북은 적이 지배한 위험지역이었다”고 지적했다. “육군첩보부대에서 특수공작원으로 복무했고 개풍군에서 첩보 수집활동 중 적의 기습을 받아 후송돼 치료받았다”는 정보사의 복무확인서, 가슴에 파편상이 있어 상이군인으로 인정한다는 보훈처 검진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2012년 서울행정법원은 “장단분견대 주둔지역은 완충지역이었다”는 논리를 유지하며 백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첩자파견 명부 기록이 없고, 증언이 엇갈리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다음해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백씨는 근거 자료를 보강해 2017년 보상심의위 재심 및 추가 소송에 나섰지만, 올 2월 서울행정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고 재판을 포기했다. 백씨는 “다 한 통 속인데 소송을 더 해 봤자 뭐하겠나”라며 억울해했다.

1951년 7월 미군의 한국전쟁 상황도. 임진강 이북이 적지로 표시돼있다. 미육군역사박물관, 백익찬씨 제공
 ◇해군첩보부대원 3명 소송 끝에 명예회복 

1951년 3월 육지를 점령한 북한군과 해상을 장악한 미 해군 함정 사이 대치가 이어지던 함경남도 영흥만. 육군첩보부대원들은 영흥만 침투 전초 기지인 모도에서 숙영을 하다가 주민들로부터 “배를 타고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뛰쳐나갔다. 어둠 속으로 다가오는 20여명을 향해 총탄 세례를 퍼부었는데 알고 보니 상대는 침투 작전을 위해 모도에 방문한 해군첩보부대(ONI) 대원들이었다. 육군첩보부대원들이나 해군첩보부대원들 모두 가슴에 맺힌 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해군첩보부대원 2명은 2005년 보상심의위에 보상급 지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보상심의위는 “증거가 없다”며 모두 기각했다. 이들은 기각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냈고 법원은 관련 기록, 당시 오인사격 현장에 있었던 육군첩보부대 소속 우종환(82)씨의 증언 등을 근거로 2011년과 2012년 각각 승소 판결을 내렸다.

승소 판결문을 받아 든 해군첩보부대원들은 자신들과 친했던 동료 고 신기덕(1921~1980)씨를 떠올렸다. 신씨의 가족을 찾아 수소문하던 중 2014년 김해시청을 통해 신씨의 아들 신현삼(61)씨와 연락이 닿았다. 아들 신씨는 “아버지가 침투 작전 중 왼쪽 팔에 관통상을 입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도와드렸다”면서 살아생전 아버지의 고통을 회상하며 보상위에 명예 회복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상심의위는 앞서 동료들이 법원에서 해군첩보부대원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이나 시간을 끌다 2017년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없다”면서 신청을 기각했다. 결국 아들 신씨는 소송을 거쳐 지난해 6월 승소 판결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라면서 손을 내민 것은 국가가 아닌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었다”고 말했다.

정부 보상심위원회에서 거부당한 북파공작원들은 법원을 통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보상심의위에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을 당한 뒤 법정 다툼을 하는 동안 시간은 지체됐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공작원들의 마음에는 상처가 남았다. 정부가 이들의 명예회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승소 판결문을 받아내기 위해 70여년 전의 기록을 뒤지고 동료들의 법정 증언을 끌어내는 것은 모두 공작원들의 몫이었다. 50년 가까이 공작원의 존재를 부정했던 국가가 이들에게 입증책임을 모두 떠넘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반석 기자 bansek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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