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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2막]캠퍼스 커플, 동아리, 대학원... 꽃노년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입력
2019.05.01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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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신중년사관학교에서 제2인생 즐기는 꽃중년들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신중년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30일 아침 교복을 입고 포항 남구 상도동 집을 나서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신중년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30일 아침 교복을 입고 포항 남구 상도동 집을 나서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30일 아침 경북 포항시 남구 상도동에 사는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는 평소와 달리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들었다. 이들 부부는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70, 80년대 중ㆍ고교생들이 입었을 옛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베레모까지 쓰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10대 커플 같지만 실제로는 마흔이 넘은 아들 셋에 손주를 둘이나 둔 70대 노부부다.

유일광씨는 “둘 다 70이 넘었지만 서로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젊었던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쑤시던 다리와 허리도 덜 아프게 느껴진다”며 “아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면 사춘기 시절 좋아했던 여학생과 몰래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어 설레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인 김애순씨도 ”40년 넘게 함께 살며 매일 본 사이지만 교복을 입는 날만큼은 처음 만났던 그 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며 “서로 건강하게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고 말했다.

유일광ㆍ김애순씨가 부부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곳은 ‘포항 신중년사관학교’라는 노인대학이다. 신중년사관학교는 포항 양포교회 김진동 담임목사가 2014년 만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만든 교양 프로그램이다. 그는 한 노인의 고독사에 큰 충격을 받고 노인들도 사회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대학교 형태의 4년제 8학기의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일주일 한 번 나와 운동과 강의를 듣고 탁구 등 취미 활동을 하는 모습은 여느 노인대학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 교복을 입고 등교하고 약 10명씩 소속 학과와 담당 교수가 있는 점은 크게 다르다. 여기에 입학식과 졸업식, 생일파티, 소풍, 수학여행이 있고, 모든 학생이 악기, 댄스, 게이트볼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 ‘구내식당 점심 값만 있으면 재미나게 보낼 수 있다’는 소문에 해마다 수 백 명의 지원자가 몰린다. 졸업한 학생들의 요청으로 대학원 과정까지 개설됐다.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신중년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30일 아침 교복을 입고 포항 남구 상도동 집을 나서기 전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신중년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30일 아침 교복을 입고 포항 남구 상도동 집을 나서기 전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늙은 나도 기다리는 사람, 갈 곳이 있다’

학생커플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유일광ㆍ김애순 부부는 5년 전 유씨가 포항시 평생학습원에서 컴퓨터 수업을 듣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노인들을 만나면서 신중년사관학교와 인연이 됐다.

그는 “교복을 입은 노인들이 수십 명씩 지나가길래 궁금해 물었다가 알게 됐다”며 “그날로 집에 와 아내를 설득해 등록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016년 3월, 손꼽아 기다렸던 학교에 입학한 부부는 교복에 반해 결심했지만 막상 둘 다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게 너무나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처음 몇 달간 학교까지는 평상복을 입고 걸어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교의 작은 행사에도 꼭 교복을 챙겨 입고 당당하게 길거리를 누빈다.

포항 신중년사관학교는 3학년부터는 포항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의 남구 장기면 양포교회 수련원에서 수업을 받는다. 포항시가 1ㆍ2학년 과정에만 도심에 있는 평생학습원을 교육 장소로 제공하고 있어서다.

올해 4학년인 유일광ㆍ김애순씨는 자동차로 40분 넘게 걸리는 양포교회 수련원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출석했다. 김애순씨는 5년 전 집 근처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궂은 날씨 아직도 온 몸이 쑤시지만 학교에 가 친구들을 만나면 통증은 물론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김씨는 “평생 집과 성당밖에 몰랐는데 학교를 다니고 이렇게 세상에 재미있는 게 많은지 처음 알게 됐다”며 “늙은 나를 기다리고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일주일 한 번이지만 꼭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데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의 캠퍼스커플인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점심 후 합창 수업에 나란히 앉아 가곡을 배우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의 캠퍼스커플인 유일광(73)ㆍ김애순(72)씨 부부가 점심 후 합창 수업에 나란히 앉아 가곡을 배우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집에선 부부, 바깥에선 꿀 떨어지는 CC(캠퍼스 커플)

유일광ㆍ김애순 부부가 학교를 다니면서 달라진 점은 이전보다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집과 성당밖에 몰랐던 김애순씨는 외출 때마다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을 꼭 챙겨 바른다. 유일광씨도 머리스타일에 신경을 쓰고, 등산과 태권도 등 평소 즐겼던 운동도 더 많이 한다.

한 눈에 봐도 다정해 보이는 이들 부부는 학교에서도 종일 꼭 붙어 다닌다. 고향이 강원 동해시 묵호면이라 바다를 좋아하고 운동을 즐기는 유일광씨가 점심을 먹고 양포 해안가를 뛸 때만 잠시 떨어져 있고 오후 합창 시간이 되면 다시 나란히 앉아 노래를 부른다. 70대 노부부의 사이 좋은 모습을 두고 유난스럽다고 핀잔을 주거나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꿀 떨어지는 CC(캠퍼스 커플)’라며 부러워한다.

유일광씨와 김애순씨가 본래부터 서로를 애틋하게 챙기는 부부는 아니었다. 이들 부부의 인생관은 신중년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약 1년 전 김애순씨가 자동차와 부딪혀 크게 다친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뇌와 다리를 다쳐 의식까지 잃었고, 이후 4차례의 대수술을 견뎌 낸 김씨는 회복 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남편 유씨는 의사마저 가망 없다 했던 아내가 살아나자 ‘부인을 새로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신중년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20년 가까이 운영했던 슈퍼마켓을 접었다. 위치가 좋아 장사가 잘됐지만 돈보다 여생을 좀 더 오래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고 과감히 정리했다. 가게를 접자 예상대로 부부의 소득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노령연금과 국민연금에 자녀들이 주는 용돈, 때로는 공공기관의 노인일자리사업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유일광씨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얻게 된 삶이라 생각해 순간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며 “오로지 아내와 우리의 남은 시간만 보고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에는 유일광ㆍ김애순씨 외에도 학교를 다니며 제2인생을 사는 꽃중년들이 많다. 대학원 1학년 과정에 다니는 김귀남(74)씨도 그 중 한 명으로, 그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아예 가게 문을 닫고 학교에 온다"며 "1년 먼저 입학했지만 암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몫까지 더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경북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에는 유일광ㆍ김애순씨 외에도 학교를 다니며 제2인생을 사는 꽃중년들이 많다. 대학원 1학년 과정에 다니는 김귀남(74)씨도 그 중 한 명으로, 그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아예 가게 문을 닫고 학교에 온다"며 "1년 먼저 입학했지만 암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몫까지 더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제2의 인생사는 신중년사관학교 학생들

포항 신중년사관학교에는 유일광ㆍ김애순씨 부부처럼 학생이 된 후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꽃중년들이 넘쳐난다.

먼저 입학한 남편을 따라 학교를 다니게 된 김귀남(74ㆍ포항 양학동)씨는 대학원 1학년으로, 4년 과정도 부족해 5년째 다니고 있다. 김씨는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남편이 신중년사관학교를 다니고 외향적으로 바뀌자 궁금함에 1년 뒤 자신도 신청서를 내밀었다. 학교에 다니기 전 ‘건강할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씨는 이제는 수업이 있는 화요일 가게 문을 닫고 등교할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즐긴다.

김씨는 남편의 권유로 한 해 늦게 시작했지만, 정작 먼저 학교를 다닌 김씨의 남편은 졸업하지 못했다. 3학년 과정을 마칠 때쯤 10년간 앓았던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김씨의 남편은 암 투병 중에도 성실히 학교를 다녀 늘 모범생으로 꼽혔다. 심지어 미국 서부로 8박9일간 떠난 수학여행에도 빠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김귀남씨는 “학교 생활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남편의 몫까지 대신 다닌다고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며 “남편이 좋아했던 수학여행이나 소풍 때는 지갑에 남편 사진을 꼭 넣어 간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의 노인대학 신중년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송치준(70ㆍ맨 앞 가운데)씨가 특강을 듣고 있다. 송씨는 지난해 초 경남 창원으로 이사했지만 학교만은 포기할 수 없어 일주일 한 번 새벽 밥을 먹고 직접 차를 몰아 2시간 넘게 걸리는 포항까지 수업을 들으러 온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의 노인대학 신중년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송치준(70ㆍ맨 앞 가운데)씨가 특강을 듣고 있다. 송씨는 지난해 초 경남 창원으로 이사했지만 학교만은 포기할 수 없어 일주일 한 번 새벽 밥을 먹고 직접 차를 몰아 2시간 넘게 걸리는 포항까지 수업을 들으러 온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송치준(70)씨는 지난해 1월 경남 창원으로 이사했지만 수업이 있는 화요일이면 오전 7시 직접 차를 몰아 포항까지 온다. 2017년 철강업체를 다니다 은퇴한 그는 현재 게이트볼학과에 재학중인데, 시합 준비와 연습으로 직장 시절보다 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아내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우울함에 자식들이 있는 창원으로 이사했는데 학교만큼은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며 “게이트볼을 하면서 40년 넘게 다녔던 직장의 옛 동료들보다 몇 년 만난 학교 친구들한테 더 많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포항 신중년사관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중인 최선호(73)씨가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과 색소폰 연주 연습을 하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포항 신중년사관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중인 최선호(73)씨가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과 색소폰 연주 연습을 하고 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최선호(73)씨는 학창시절 가난으로 포기했던 것들을 신중년사관학교에서 다시 이뤄내고 있다.

최씨는 “고등학교 때 총학생회장을 하고 고가의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소위 잘나가는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모두 그만둬야 했다”며 “여기 입학한 뒤 바이올린을 다시 손에 쥐고 색소폰까지 배우게 됐고 총학생회장 맡으면서 지난날 내 인생의 잃어버린 조각을 채워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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