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인도 방갈로르 타운홀에서 열린 스리랑카 폭탄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시위 도중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4월 21일,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축일의 아침. 스리랑카에선 핏빛 비극이 일어났다. 성당 세 곳과 호텔 네 곳 등 모두 여덟 곳에서 연쇄 폭발 테러가 벌어진 것이다. 사망자만 350명이 넘고 부상자도 500여명에 달하는 대참사였다. 사건이 부활절에 벌어졌다는 점, 성당이 주요 테러 목표였던 점 등을 볼 때 종교적 테러가 강하게 의심되었고, 실제로 스리랑카 정부는 이 테러가 급진 이슬람 조직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부활절 미사를 핏빛으로 물들인, 피해 규모 또한 엄청난 테러였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프랑스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 때는 ‘나는 샤를리다’ 라는 운동이 벌어졌고, 파리 테러 때는 ‘파리를 위한 기도’로 온 세계가 연대했다. 서울 남산타워도 애도의 의미로 프랑스 국기 색으로 조명을 비췄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규모만 보면 이번 스리랑카 테러가 훨씬 큰 참사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17년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358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다. 소말리아는 그 전부터 반군과의 내전과 테러로 신음하는 국가였으나, 우리는 다만 이 나라를 여행 금지국, 해적의 소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애도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이 이런 차이를 불러왔는지는 명확하다. 프랑스는 공고한 민주주의를 이룬 서구 선진국이고, 그 점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를 친숙하게 느껴지게 했을 것이다. 북미와 유럽 선진국을 테러리즘의 피해자로, 이른바 제3세계를 그 대척점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 사실 프랑스 파리를 위해 애도하고 연대했다 해서 스리랑카와 소말리아의 피해자들에도 똑같이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다만, 그렇다 해도, 우리의 애도가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이 사건을 보면서는 더욱 그렇다. 스리랑카 테러로부터 한 주 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다. 세계 각지에서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졌고 기부의 손길도 잇따랐다. 일주일 후의 스리랑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노트르담 대성당이 문화적으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긴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스러진 사고에 비할 바는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트르담을 불태워야만 하는 일이 생긴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스리랑카에서 스러진 그 수많은 목숨들보다도 성당 건물이 더 많은 위로를 받는 모습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재 발생 사흘 만에 1조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다. 한편 지난해 9월 대화재로 큰 피해를 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박물관은 지금껏 3억원의 기부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미 최대의 자연사 박물관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결코 못하지 않은 곳인데도 그랬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바로 그 브라질의 한 부호가 노트르담 대성당에 250억원의 거액을 쾌척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노트르담 대신 자국의 국립박물관에 기부했다면, 박물관도 복원 자금 부족에 허덕일 필요가 없었을 터이다.

여기에서 서구 선진국 중심의 정치ㆍ경제적 질서가 테러의 근원 중 하나이며, 열강의 패권주의가 테러를 격화시키고 있다는 식의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아주 작은 생각일 따름이다. 선진국에서 일어난 비극이 우리의 마음을 더 흔드는 데가 있다면, 일부러라도 연대의식을 더 확장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스리랑카를 위한 기도가 모두의 마음에서 우러나지는 못할지라도,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애도일지라도 괜찮다. 그게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지 모른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