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이 가장 잘 어울릴까. 봄의 화사한 개나리나,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나, 유치원생의 원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랑’은 어떨까. ‘복수’라는 단어가 품은 처절한 비통과 서슬 퍼런 증오와 어울리지 않는, 생동하는 색인 노랑을 복수의 상징으로 그려내는 일이 가능할까. ‘비극적 기품’이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권여선 작가라면 가능하다.
2016년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 된 권 작가가 언니를 잃은 여동생의 복수극을 그린 장편소설 ‘레몬’으로 돌아왔다. 선명하면서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 작가답게,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우리 삶에 남기는 파장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2016년 문예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개작한 것으로, 2017년 동명의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소설은 2002년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떠있던 순간에서 시작한다. “쉽사리 직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열 아홉 살 소녀 해언이 공원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린 이 참극의 용의자는 해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신정준과 한만우. 신정준은 해언이 공원에서 발견되기 전 마지막으로 타고 있던 차량의 운전자였고, 한만우는 신정준의 차에 탄 해언을 목격한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은 여느 복수극과 달리 ‘둘 중 누가 진짜 용의자인가’를 밝히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대신 복수의 주체이자 해언의 두 살 터울 여동생인 다언이 17년에 걸쳐 언니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애도의 형식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레몬
권여선 지음
창비 발행ㆍ208쪽ㆍ1만 3,000원
소설의 많은 분량은 이 비극적 사건과 얽힌 인물들이 해언의 죽음으로 생겨난 공허를 각자의 삶에서 메우려 분투하는 모습을 고백하는 데 할애된다. 해언의 아름다움은 죽음으로써 종결됐지만, 남은 이들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려 하거나, ‘용서’를 구하려 하거나, ‘치유’를 찾으려 한다.
소설에서 ‘치유’의 매개가 되는 것은 ‘시’와 ‘신’이다. 어떤 이들은 신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과오를 씻어내거나 위로 받으려 하고, 어떤 이들은 시로써 회복을 꿈꾼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신은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는 절박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배신의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어요”라는 다언의 말처럼. 24일 이메일로 만난 권 작가는 “큰 불행을 겪으며 신을 불신하고 부정하게 됐지만,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방식의 위로, 즉 언어와 시를 통한 위로와 애도의 가능성은 아직 믿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소설의 제목인 ‘레몬’은 해언이 발견됐을 당시 입고 있었던 노란 원피스를 비롯해 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랑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레몬, 참외, 반숙의 달걀 노른자 등 다양한 사물과 느낌으로 표현된다. 권 작가는 “소설 속 노랑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레몬 과자처럼 밝고 명랑한 것에서 비극을 환기시키는 빛깔로 바뀌었다가, 복수를 다짐하는 빛깔로, 다시 치유의 빛으로 계속 변화한다”며 “노랑은 복수의 빛이기만 한 게 아니라 과거의 행복을 환기하는 빛, 잃어버린 낙원의 빛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에서 복수는 결국 성취된다. 하지만 복수는 ‘해방’의 동의어는 아니다.권 작가는 끝내 다언이 하는 복수에 대해 “윤리적 복수”라고 덧붙였다. “다언의 복수는 사건을 종결 짓는 복수가 아닌, 시시각각 자신의 죄를 환기하는 대상을 품고 가는 식의 복수다. 복수하되 그 칼끝에서 자기도 자유롭지 못하는 복수이고, 평생 자신에게 처벌을 내리고 그 죄값을 받는 복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