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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대를 말해주는 집

입력
2019.04.2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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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위치한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서울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위치한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서울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서울의 어느 주택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이 든 여인이 혼자 살던 오래된 이층집이다. 잘 꾸며진 커다란 드레스룸과 파우더룸, 벽난로를 갖춘 넓은 마루, 꽃나무가 근사하게 어우러진 정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볕이 드는 선룸까지 갖추었으니 근사한 집이 틀림없다. 조명과 주방 찬장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다.

원래의 집이 마음이 들지 않아 유명한 건축가에게 맡겨 이쁘게 고쳐 지은 집이다. 둥그렇게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와 따뜻한 색조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건축가의 특성이다. 아침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할 때면 여러 가지 색이 바닥에 비췄겠다. 창문 아래 라디에이터 그릴도 고급스럽게 바꾸었다. 건축가와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떤 요청을 했는지는 온전히 비밀이다. 그러나 건축가가 고민한 것들이 무엇일지 이 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온 가족이 함께 살던 집에 어느덧 여인 혼자 남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살고 싶었을 이 집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동네가 재건축 예정지가 되었다 취소되면서 집들이 하나둘씩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갔고,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용해서 살기 좋았던 동네는 공사장 소음이 휘몰아쳤다. 마당에서 나무를 가꾸던 소소한 평화는 오래전에 깨어졌다. 집 바로 뒤에도 높은 건물이 들어섰고 그 뒷집도 옆집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앞집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언제 사라지고 높은 건물로 바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웃들도 하나둘 떠났고 동네에 정을 붙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집은 그대로지만 동네가 변했다.

유명 건축가와 관계된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구청에서 구매를 원했다. 집을 보존하려는 구청의 취지가 반가웠던 여인은 마음 편히 다른 거처를 찾아갔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자연과 가까운 삶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 집은 건축가의 이름을 부각하여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으로 개관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한 후 김중업 홍보실, 세미나실 등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보수 작업을 한 것 외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아 원래 집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주택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건축가 김중업과 관련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설계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확한 자료가 없으니 확신할 수가 없다. 당시 활동했던 건축가들조차도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 자체가 이야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70년대 상류층 주택에 조성된 조경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정원이나,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만든 가구와 내부 구조, 깨진 곳 없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등 유명 건축가의 이름이 붙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집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곳에 살던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이 동네의 삶도 궁금해졌다. 집은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대단한 영웅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꼭 건축가를 부각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1960~70년대의 건축문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분명 중요한 가치를 갖지 않을까? 이 동네에 살았던 ‘어느 여사님’의 아름다운 집이 그 시절 가장 유명했던 건축가와 어떤 식으로 만났는지 상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동네의 세밀한 이야기들, 이 동네의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다녔고 이 동네의 여사님들은 어떤 시장을 다녔는지, 지역의 역사와 한 집안의 이야기가 만나는 장소로 이 집이 자리매김해줄 수 있지 않을까?

유명인이 살던 집이 아니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시대를 말해주는 건축은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집들이 도시의 기억을 품는다. 지자체의 생가 복원 프로젝트처럼 유명인에 기대어 억지로 만들어진 역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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