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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영양실조로 쓰러진 최은희 업고 뛴 신상옥

입력
2019.04.27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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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세기의 영화커플 신상옥-최은희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26세의 청년 신상옥은 ‘악야’(1952)의 필름 촬영분을 싸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김광주의 소설을 각색해 16㎜ 카메라로 찍은 이 데뷔작은 대구에서 편집을 마무리 짓고 임시수도 부산의 극장에 걸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의욕에 찬 신인 감독은 한국의 명승고적과 역사를 해외에 소개한다는 포부를 품고 차기작 ‘코리아’(1954)에 돌입했다. ‘가나다라’ 순으로 네 개의 에피소드를 한데 엮은 옴니버스 구성의 영화는 서울, 경주, 금강산, 해인사, 제주도를 훑는 방대한 로케이션으로 인해 촬영일정이 늘어졌고, 제작비 조달에 난항을 겪었다. 2년을 끈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코리아’는 신상옥의 삶에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평생의 반려이자 영화적 동료인 배우 최은희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리아’에서 최은희는 ‘춘향전’을 다룬 ‘다’ 에피소드의 춘향 역을 맡았다. 나중에 ‘성춘향’(1961)에서 다시 춘향을 연기하게 되는 걸 떠올리면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최은희(왼쪽) 신상옥 부부의 다정했던 한때. 유명배우와 촉망받는 젊은 감독의 결합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은희(왼쪽) 신상옥 부부의 다정했던 한때. 유명배우와 촉망받는 젊은 감독의 결합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촬영감독과 동거하던 최은희, 전쟁 중엔 다방일로 생계 

1943년 극단 ‘아랑’의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최은희는 해방 후 ‘새로운 맹서’(1947),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에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신상옥을 만나기 이전, 최은희는 선배로 따르던 배우 김연실의 주선으로 그녀의 남동생이자 촬영감독이었던 김학성을 만나 동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학성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12살 많았던 김학성은 전처와의 사이에 자녀가 있었고 의처증이 심해 가정폭력을 일삼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된다. 김학성은 종군 촬영기사로 일하다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서울에 머물렀던 최은희는 공산당 연극배우 심영에 의해 납북되어 인민군 경비대 협주단으로 끌려갔다가, 평안남도 순천에서 간신히 탈출하는 등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낸다.

전쟁 중 최은희는 다방에서 일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국군 정훈공작대에 동원되어 위문공연을 다녔다(자서전 ‘고백’에 따르면 권총이 머리에 겨눠진 채로 헌병대장에게 성폭행당하는 충격적인 일까지 겪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기에 신상옥과 만나 눈이 맞았다. 연극 ‘야화’의 공연 중 영양실조로 쓰러진 최은희를 객석에서 보고 있던 신상옥이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간 일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 ‘코리아’의 캐스팅을 수락했다고 한다. 1953년에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에 골인한다. 한국영화사를 풍미하는 ‘세기의 커플’의 탄생이었다. 프러포즈할 당시 신상옥 감독은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찍을 영화들이 떠오른다. 상상력의 원천이랄까?” 훗날 방송에서 최은희는 “신 감독 첫 인상은 수더분했다. 잘생기지 않았는데 옷맵시가 좋았다. 늘 사색에 젖어 있었던 모습이었고, 성냥을 부러뜨리는 습관이 있었다”며 “작품을 하다 보니 서로간의 순수성을 보며 좋아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1953년 8월 영화 '코리아' 촬영 당시 영화배우 최은희(아래 가운데)가 동료 배우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3년 8월 영화 '코리아' 촬영 당시 영화배우 최은희(아래 가운데)가 동료 배우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간통죄는 아니었지만… 축복받지 못했던 세기의 결혼 

언론이 간통죄 1호 사건으로 대서특필했지만, 최은희는 김학성과 동거할 때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시대 분위기에서 신상옥과 최은희의 결혼은 축복받지 못했다. 신상옥은 선배 영화인의 여자를 빼앗은 ‘몹쓸 인간’ 취급을 받았고 한동안 영화계에서 따돌림과 비협조에 시달려야 했다. ‘코리아’의 후반 작업 때 현상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고, 최은희의 동생 최경옥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가 함께 찍은 첫 영화 ‘꿈’(1955, 1967년 신영균 주연으로 리메이크된다)의 편집은 두 사람의 방에서 가내수공업처럼 이뤄졌다고 한다. ‘악야’에 이어 양공주 문제를 다룬 ‘지옥화’(1958)를 발표한 그 해, ‘국산영화 제작장려 및 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혜조치‘와 같은 영화진흥 정책이 발표되면서 한국영화는 중흥의 계기를 맞는다. 전작들의 실패로 위축되어있던 신상옥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은 서울 관객수 10만의 흥행을 기록하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기업화를 꿈꾸는 내게 있어서 흥행에 대한 자신감은 매우 소중한 소득이었다. 만약 이 작품마저 흥행에 실패했으면 그 후 나의 영화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신상옥의 회고다. 이 작품에서 최은희는 여성변호사 역으로 열연해 ‘지옥화’의 팜파탈과는 결이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여성의 불행에 대한 공감과 연민, 능동적인 인텔리 여성상을 비친 이 영화는 한국 페미니즘 영화의 선구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후 멜로드라마에 일가견을 보인 신상옥은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춘희‘ ’동심초‘ ’자매의 화원‘(1959)를 잇달아 발표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신상옥이 메가폰을 쥐면 여주인공은 온전히 최은희의 몫이었다. ‘동심초‘에 이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도 정숙한 미망인 역을 맡으면서 최은희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은희(왼쪽)가 주연을 맡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은희(왼쪽)가 주연을 맡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영화계 파워 커플… 최은희, 영화감독 되다 

‘로맨스 빠빠’(1960)의 성공으로 부부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신필름의 창립작이었던 이 영화가 벌어들인 수익은 ‘성춘향’과 ‘연산군’(1961), ‘폭군연산’과 ‘열녀문’(1962) 같은 사극대작을 제작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3,000만환의 거금을 들여 장충동에 집을 마련하는 등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윤택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아이가 없었던 부부가 친척 조카인 신명희를 맞딸로 입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최은희는 장충동 저택에서 보낸 3~4년을 돌이키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벙어리 삼룡’(1964)을 마친 뒤 최은희는 이서구 원작의 TV 연속극을 영화화한 ‘민며느리’(1965)로 주연만이 아니라 감독을 겸하게 된다. 남편의 꾸준한 권유로 새로운 공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총 세 편을 연출한 최은희는 박남옥, 홍은원 감독에 이은 세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기 되었고, 1967년부터는 남편이 설립한 안양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영화계의 후진 육성에 힘쓰게 된다.

북한에서 활동할 때 일본 선데이 마이니치지에 실린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북한에서 활동할 때 일본 선데이 마이니치지에 실린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상옥(왼쪽)과 최은희가 북한 억류 시절 김정일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북한 영화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앳나인필름 제공
신상옥(왼쪽)과 최은희가 북한 억류 시절 김정일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북한 영화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앳나인필름 제공

 ◇신상옥의 불륜과 파경, 그리고 납북 

‘이별’(1973)의 파리 로케이션 과정에서 신상옥과 여배우 오수미 간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면서 부부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최은희는 “한 때의 바람”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오수미가 신상옥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춘희 75’(1975)의 주인공으로 오수미가 낙점되면서 파경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신상옥과 최은희의 이혼은 한 가정의 파국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최은희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신필름과 박정희 정권, 재계의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5년 11월 신필름의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자 낙담한 신상옥은 안양촬영소를 매각하고 미국, 프랑스 등지를 오가며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8년 1월 14일 사건이 터졌다. 안양예술학교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고자 홍콩으로 간 최은희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것이다. 신상옥 또한 7월 19일 최은희의 행방을 찾고자 홍콩을 돌아다니던 중 납북됐다. 남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최은희-신상옥 납북사건이었다.

납치는 북한 영화산업의 성장과 대외선전물의 양산을 도모하던 김정일의 기획이었다. 최은희는 김정일의 환대를 받고 별장에 머물게 되었지만, 신상옥은 두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고문과 5년간의 감금생활을 견뎌야 했다. 두 사람의 해후와 재결합은 1983년 3월 김일성, 김정일이 연 만찬회장에서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신상옥ㆍ최은희 부부는 10월 20일 북한의 신필름에 첫 출근한다. 총 17편의 영화를 감독, 제작하고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으로 망명해 탈북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수기인 ‘김정일 왕국’과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2016)에 잘 드러나 있다. 신상옥ㆍ최은희 부부는 1990년까지 워싱턴에서 CIA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고, 1999년에 와서야 영구 귀국하게 된다. 복귀작 ‘마유미’(1990)와 소품 ‘겨울이야기’(2004)를 찍으며 늘그막까지 영화를 놓지 않았던 신상옥은 2006년 4월 11일, 반려였던 최은희는 2018년 4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사의 파란을 온 몸으로 살아낸 ‘세기의 연인’의 퇴장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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