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대로 그의 작품엔 ‘시작점’이 없다. 어디서부터 그림을 읽든, 관객 마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한 폭 안에 여성의 신체, 우물, 확성기, 잎사귀, 큰 따옴표 등 수많은 오브제들이 담겨 있다. 연관성이나 정렬 규칙을 찾긴 어렵다. 누군가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 아주 개인적인 작품 같다가도, 오브제들의 면면에 사회적 메시지가 숨은 듯 해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률(40) 작가의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 이야기다. 박 작가는 “내 작품엔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다”고 말한다. “예술이 꼭 어떤 의미를 담아내야만 할까요? 그림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예술 행위에 의문이 들어요. 제 작품은 저도 모르게 긋는 선과 점으로 뭉친 ‘무의식적 드로잉’ 그 자체예요. 굳이 작품을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서 관객들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서울 종로구 백아트에서 박 작가의 개인전 ‘On Evenness’가 열리고 있다.
박 작가는 오랫동안 ‘무의식’을 향한 관심을 키워왔다. 2013년엔 그 답을 찾으려 치매 노인들과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정 기억과 자각이 사라진 치매 노인들을 오랜 기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보게 했다. “규칙이나 논리가 없는 그림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어서 놀랐죠. 기승전결이 명확했고 논리성도 있었어요.” 박 작가는 ‘무의식’을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기로 했다. 기억과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적이지만 꽤 논리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관객만 있다면 굳이 그림에 내러티브를 부여해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작가의 작품 분위기는 몇 년 전 영국 유학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오브제의 세부적 디테일보다 선과 여백 표현에 더 공을 들이고, 입체감보단 평면적 유화의 느낌을 강조하게 됐다. 유학 기간 중 심하게 다치는 사고를 겪은 뒤 “그림 그리는 도구로서의 신체”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오래 앉아있기 힘든 탓에 불필요한 과정을 하나 둘씩 없앴다”며 “대신 선과 여백을 더 많이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변하지 않은 건 특유의 오묘한 색감이다.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파랑, 분홍부터 쨍한 연두, 빨강까지, 그의 색 표현 폭은 넓기로 유명하다. 박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문화권에서 살아 본 경험 덕”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친구들은 12가지색 크레파스를 쓸 때 저는 120색을 쓴 경험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며 “작품을 시작할 때 무엇을 그릴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색을 쓸지는 오래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장르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박 작가 작품의 묘미다. 백아트 2층에는 회화부터 조각, 오브제 등이 뒤섞여 설치돼 있다. 각 작품이 독립적으로 의미를 갖는 형식이 아니라, 2층을 하나의 캔버스라 보고 모든 요소들이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구성했다. 3층에는 큰 창에 투명한 파란 판 3개를 설치해 빛의 형태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이도록 했다. 전시는 5월8일까지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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