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DC 중심부 K스트리트에는 ‘시츄안 파빌리온’ 이라는 사천식 중국 음식점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직원은 물론이고 미 국무부나 백악관 직원도 자주 올 정도로 인근에서는 꽤 유명하다. 적당히 매워 한국인 입맛에 맞는 ‘마파두부’ 만큼 눈에 띄는 건 독특한 영업전략이다. 평일 점심 12시30분 이전 음식을 먹고 나가면 10%를 깎아 준다. 이 음식점의 영업전략을 거꾸로 생각하면 워싱턴에서는 낮 12시30분이 되어야 본격적인 점심시간이 시작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과 미국 직장인의 점심 문화는 이처럼 많이 다르다. 미국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12시까지 자리를 지키고 일한다. 밥도 금방 먹는다. 시츄안 같은 음식점에 가는 경우는 드물고 많은 이들이 길거리 푸드트럭에서 5~10달러짜리를 간단히 먹고 사무실로 돌아간다. 대신 퇴근도 칼 같이 지킨다. 12시 훨씬 이전부터 나와서 오후 업무도 1시 이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굳이 고백하자면,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정부가 주 52시간 근무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을 때 걱정했던 것도 그런 기억 때문이다. ‘적당히 오래’ 일하는 것으로 버텨 온 한국 경제가 ‘적당히 짧게’ 일하게 된다면 미국의 80% 수준이던 생산성이 더 하락할 수 밖에 없다는 걱정이었다. .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점심시간만큼이나 경계가 흐릿한 우리 사회의 직업 윤리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성인물 배우의 폭로는 미국 사회에서 크게 먹혀 들지 않았다. 애당초 그 배우가 돈 받고 비밀준수 서약을 한 게 알려지면서 폭로의 순수성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공익을 명분으로 하는 폭로 내용도 중요하지만, 개인 차원의 직업 윤리를 더 중시하는 게 미국 문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익이라는 명분만 대면 모든 게 용인된다. 최근 재벌가 3세 여성 경영자가 약물 주사를 맞았는지 여부를 놓고 불법 시비가 붙었다. 병원 근무자가 그만두면서 돌발적으로 내놓은 폭로에 따른 것이었다. 요즘 한국을 뒤흔들고 있는 ‘버닝썬’ 사건도 연예인으로부터 스마트폰 수리를 의뢰 받은 수리공이 파일을 빼돌린 것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직무 중 얻은 정보로 주식투자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직업윤리에 대한 고민 없이 세상에 나온 사적인 비밀은 범죄행위가 되는지 여부가 불분명한 가운데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정권 잡기 전에는 공무원의 내부 고발을 장려하던 세력이 집권한 뒤 비슷한 사례를 ‘비겁한 무리’의 소행으로 치부하는 일도 생긴다. 물론 반대 정치세력은 상반된 행태로 그런 정보를 정파적으로 이용한다.

공적 이익보다 직업 윤리를 앞세우는 미국 문화가 우리 눈에는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직이나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개인의 신념에 따라 처음부터 거부한 경우는 존중된다. 법원도 그런 용기를 보호하는 추세다. 동성 커플의 결혼 축하용 케이크 주문을 종교적 신념에 따라 거부했다가, 고객을 부당하게 차별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던 제과점 주인의 손을 미국 대법원이 들어 준 경우가 대표적이다.

공익을 위한 비밀의 폭로와 비밀을 지켜야 할 직업윤리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갈등 관계’가 존재한다. ‘성장과 분배’, ‘경쟁과 평등’에서 뭐가 우선돼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처럼 답을 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 비밀을 지키는 건 비단 의사나 변호사만의 일은 아닐 터인데 사적인 내용의 위법성이 가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 없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인 건 틀림없다. 잇따른 공익성 폭로가 최근 여론의 지지보다는 혼란을 증폭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직업 윤리의 소중함이 강조되어도 사회의 건강성에 문제가 없을 듯 하다.

조철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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