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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블랙홀의 그림자

입력
2019.04.24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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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블랙홀 관측에 성공했다. EHT 프로젝트 총괄 단장이자 하버드 스미스소니안 천체물리센터의 쉐퍼드 도엘레만(Sheperd S. Doeleman) 박사가 10일 미국 워싱턴 DC 프레스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류 최초로 블랙홀 관측에 성공했다. EHT 프로젝트 총괄 단장이자 하버드 스미스소니안 천체물리센터의 쉐퍼드 도엘레만(Sheperd S. Doeleman) 박사가 10일 미국 워싱턴 DC 프레스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10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흥분시켰다. 검은 배경에 불그스름하고도 흐릿한 도넛 모양의 영상을 아마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상 최초로 블랙홀을 찍은 사진이었다. 블랙홀은 좁은 영역에 질량이 집중돼 주변의 중력이 매우 강력한 천체이다. 블랙홀의 주변에는 중력이 너무나 강력해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경계면이 존재한다. 이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면 빛도 밖으로 나올 수 없으므로 블랙홀을 직접 관측할 방법은 없다. 다만 블랙홀이 은하 중심의 밝은 영역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 그 주변의 신호를 관측해서 이른바 블랙홀의 ‘그림자’를 포착할 수 있다.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 EHT)’이라 부르는 국제연구진이 블랙홀로부터 얻은 영상은 사실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 파장대의 빛을 본 것은 아니다. EHT는 가시광선보다 훨씬 파장이 긴 빛(전자기파)을 분석해 블랙홀의 그림자 이미지를 얻었다. 이렇게 긴 파장의 빛을 관측하는 망원경이 전파망원경이다. 짐작했겠지만 대단히 크고 성능이 좋은 전파망원경이 있어야 멀리 있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을 수 있다. 이번에 관측한 블랙홀은 지구에서 약 5,500만 광년 떨어진 M87이라는 은하의 중심부에 있는 블랙홀(M87^*)이다. 대단히 멀리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봤을 때 달 표면의 토마토를 식별하는 정도의 해상도를 확보해야 한다. 이 정도의 해상도를 얻으려면 지구 크기의 전파망원경이 필요하다. 똑똑한 과학자들은 지구 크기의 전파망원경을 만드는 대신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8대의 전파망원경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가상 망원경(지구 크기의 망원경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을 구축했다. EHT는 그렇게 태어났다.

블랙홀은 현대적인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의 본질을 시공간의 곡률로 이해한다. 태양같이 무거운 물체가 있으면 그 주변의 시간과 공간이 휘어지며 지구나 다른 행성, 그리고 빛도 그렇게 굽은 시공간의 최단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어떤 영역에서는 시공간의 곡률이 급격하게 커져서 무한대로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좁은 영역에 큰 질량이 집중되면 그 어떤 메커니즘으로도 자체의 질량에 의한 중력붕괴를 막을 수 없어 시공간의 굴곡에 파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천체가 블랙홀이다.

은하 중심에는 엄청난 질량의 블랙홀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M87^*은 그 질량이 무려 태양 질량의 65억 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무거운 천체 주변에서는 시공간도 크게 휘어져서 주변을 지나는 빛의 경로를 많이 꺾는다. 블랙홀이 일종의 렌즈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건의 지평선에 가깝게 지나가는 빛은 블랙홀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적당히 멀리 지나가는 빛은 블랙홀 주변을 맴돌거나 지나간다. 이런 빛들을 포착하면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을 수 있다.

EHT의 사진을 처음 보고서 흐릿한 도넛 모양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도넛 모양이다. 좀 흐릿하긴 해도 한가운데의 검은 영역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는 일반상대성이론에 기초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정말로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은 것이다. 그림자의 안쪽 어딘가에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

EHT는 전 세계 60여 개 연구기관에서 2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모인 연구단이다. 전 지구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빅 사이언스’는 현대과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물론 모든 과학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 지성의 경계에서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천문학적인 돈과 거대한 장비들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런 현장에서는 나 혼자 잘하는 능력보다 다 같이 잘하는 능력, 말하자면 협력과 소통과 조화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내 옆의 친구보다 1점이라도 더 받아야 살아남는 ‘스카이캐슬’ 속에서만 살아 온 우리들에게는 무척 낯선 덕목이다. ‘한국형 천재’의 시대는 진작 끝났다. 4차 산업혁명에서 말하는 초연결의 본질을 과학자들은 이미 대형 입자가속기에서, 중력파 검출장치에서, 그리고 EHT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래 전부터 나와 주변의 과학자들은 이제 우리도 한국형 빅 사이언스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 왔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바로 21세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글로벌 콜라보’를 주도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EHT에는 한국 과학자들도 8명이 속해 있다. 아주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인간 지성의 경계를 넓히는 작업에 우리도 한몫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기엔 충분하다. 블랙홀의 그림자를 추적해 온 이분들의 노력이 한국 기초과학의 열악한 그림자를 비춰주는 한줄기 빛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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