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현상에 따라 농사를 짓는 절기를 나타낸 달력을 ‘농사력(農事曆)’이라고 하는데, 농사력에 따르면 청명(淸明) 무렵에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하고 요즘처럼 봄비가 내리는 곡우(穀雨) 무렵에는 볍씨를 담그고 못자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볍씨를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볍씨를 담근 항아리에는 금줄을 쳐 고사를 지냈고 볍씨를 담아 두었던 가마니는 잡귀를 막기 위해 솔가지로 덮어 두었다. 또한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안에 들어와 볍씨를 보지 못하게 하였는데,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면 싹이 잘 트지 않아 농사를 망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볍씨를 남부 지방에서는 ‘씨나락’이라고 불렀는데, 이처럼 ‘씨나락’이 농사에 중요한 자원이었다는 데에서 유래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속담이 만들어졌다. 신주 모시듯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할 ‘씨나락’을 귀신이 까먹고 있으니 전혀 이치에 닿지 않고 엉뚱하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씨나락’이 아닌 ‘씻나락’이 ‘볍씨를 이르는 말’로 등재되어 있고 속담에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씨나락’을 발음할 때 ㄴ 소리가 첨가돼 [씬나락]으로 나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붙여 ‘씻나락’으로 표기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씨나락]으로 발음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씻나락’이 표준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씨감자’, ‘씨돼지’, ‘씨소’, ‘씨고치’, ‘씨눈’, ‘씨조개’, ‘씨짐승’ 등 ‘씨’가 붙는 합성어들에는 사이시옷이 붙지 않는데, ‘씻나락’에만 사이시옷을 붙이는 것도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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