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정부-반군-분리주의 3자, 각자 독립적 입지 구축
지난 13일(현지시간) 예멘 정부는 남동부 하드라마우트주(州) 세이윤에서 긴급 의회를 소집했다. 2014년 9월 예멘 내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무려 16년 전인 2003년 마지막 총선을 통해 구성된 의회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했던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도 4년 만에 예멘으로 돌아왔다.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하디 정부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예멘의 공식ㆍ합법 정부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자국을 4년여 만에 방문하는, 그리고 이러한 소식이 ‘속보’로 전해지는 현실은 분명 정상국가에선 한참 벗어난 예멘의 정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디 정부는 망명정부가 아니면서도 국내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의회 소집은 그야말로 국제사회의 ‘공인’으로 연명하는 하디 정부가 그에 기대어 정당성과 존재감을 다시 상기시켜 보려는 몸부림으로 풀이됐다.
이날 의회에는 총 267명 의원 중 136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날인 14일, 참여 세력들은 ‘정치동맹’ 결성을 선포했다. 17개 정당으로 구성된 정치동맹은 “북부 후티 반군에 대항하는 남부의 ‘합법적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공표했다. 지지 기반이 취약한 하디 정부에 힘을 몰아주자는 절박한 움직임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번 긴급 의회 소집이 ‘전쟁국가’로 4년 이상을 보낸 예멘의 정치 동향에 중요한 흐름임은 분명하다. 후티 반군은 즉각 비난 성명을 냈다. 또 자신들의 통치 구역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 가운데 세이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의석을 새로 채우겠다며 14일 보궐선거까지 치렀다.
특정한 명명도 없이 오로지 하디 정부의 생명력을 연장하자는 취지로 구성되긴 했지만, 새로운 정치동맹의 면면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실각한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의 ‘총인민위원회(GPC)’가 있다. 과거 33년간 독재정치를 펼친 살레 전 대통령은 자신이 쫓겨난 뒤 들어선 하디 정부한테서 다시 권력을 빼앗겠다며 한때 정적이었던 북부의 후티 반군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바로 그 후티 세력에 의해 2017년 12월 암살당했다. 이후 GPC는 ‘반(反)후티’ 진영으로 즉각 돌아섰고, 이번에 새 정치동맹에 가담한 것이다.
또 ‘이슬라당(Islah Party)’으로 알려진 ‘개혁을 위한 예멘통합’도 참여했다. 이슬라당은 예멘의 무슬림형제단 계열로 인식되는 정치 세력이다. 1928년 이집트에서 출범한 무슬림형제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이슬람운동 단체인데, 나름대로 민주적 절차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존중하며 이슬람주의를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슬라당의 정치 노선도 이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1990년 예멘이 통일되기 전 남예멘의 집권당이었던 ‘예멘사회당’, 후티 반군과 마찬가지로 북부 자이드(Zayid, 시아 분파의 일종) 계열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인 ‘알 라샤드당(al-Rashad party)’ 등도 이번 동맹의 일원이다. 여기엔 예멘 정치의 변화무쌍한 구도가 물씬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예멘 이전 소비에트 공산주의 블록에 속했던 남예멘의 집권세력 출신인 예멘사회당이 현재 아랍에미리트(UAE)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국가를 요구하고 있는 분리주의 진영 ‘남부과도위원회(STC)’와는 다른 노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북부의 자이드 그룹이 남부의 정치 세력과 한배를 탄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이와 관련, 미국 국무부 대변인실은 지난 13일 성명을 통해 “(내전이 발발한) 2014년 이래 처음으로 예멘 의회가 소집된 것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이어 “예멘 정부가 합법적 정부 기관들을 재가동하고 ‘전국대화협의체(NDC, 2011년 살레 전 대통령 실각 이후 예멘의 모든 정치 세력이 화해 모색을 위해 참여했던 기구)’의 논의 결과를 실천하며 걸프국가연합(GCC)이 제시한 비전을 따라 평화적 권력이양을 완성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예멘 분쟁의 정치적 협상 과정은 걸프왕정국가들의 연합체인 GCC가 주도하고 있는데, 이는 예멘이 ‘협상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대외적 한계다. 아울러 새 정치동맹에 남부의 최대 정치세력인 STC가 빠져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대내적 한계로 작용할 것이다.
STC의 불참은 이번 긴급 의회가 공식 수도(사나)는 물론, 임시 수도(아덴)에서조차 소집되지 못하고 제3의 도시(세이윤)를 택했다는 사실과도 맞물려 있다. 사나가 후티 반군에 넘어간 지 오래지만, 그 이후 임시 수도 기능을 해 온 아덴마저도 하디 정부는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월 28일부터 나흘에 걸쳐 하디 지지 세력과 STC가 맞붙은 ‘아덴 전투’로 인해 아덴은 사실상 STC가 장악한 지역이 됐다. 그 결과, STC의 분리주의 로드맵은 더욱 공고해졌다. 게다가 STC는 지난해 10월 3일 성명에서 “남부 모든 지방이 소위 합법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하디)정부의 처참한 정책 운영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항쟁을 선포했다. 하디 정부와는 더 이상 연루되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디 정부의 취약성은 세이윤 주민들의 반응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의회 소집 예정’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이 소집일 며칠 전부터 거리로 뛰쳐나와 반대 시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예멘 망명 활동가들이나 옵저버들이 전하는 시위 동영상과 구호들은 하디 정부에 대한 반감, 분리주의 기운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불법적 의회 소집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피켓은 물론, “하드라마우트는 남예멘 영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당신들은 조용히 떠나라. 그러지 않을 땐 칼라슈니코프(러시아제 자동소총)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유엔과 국제사회는 예멘 평화 협상 테이블을 ‘하디 정부’와 ‘후티 반군’, 이들 두 세력을 중심으로 마련해 왔다. 지난해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협상에서도 분리주의 진영은 배제됐다. 그러나 ‘정부와 반군’이라는 이원 구도로만 접근하기엔 예멘 분쟁의 당사자 그룹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매우 거칠게 보더라도 이미 최소 3개 이상의 정치 세력이 제각각 독자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수도 사나를 장악한 후티 반군 정부가 있고, 생존 싸움에 나선 하디 정부도 있으며, 아덴을 사실상 장악한 채 UAE의 지원 하에 독자적 정부마냥 행보를 이어가는 STC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예멘에 ‘세 개의 정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STC는 24명의 집단 지도체제 아래 총 300명으로 구성된 그들 방식의 의회를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남부와 동부 일대 8개 지방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워싱턴과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에 각각 ‘STC 외교대사’를 두고 국제사회를 상대로 외교 및 로비 활동도 벌인다. 브뤼셀에서 ‘STC 대사’ 노릇을 하는 아흐마드 오마르 빈 파리드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민주주의와 합법적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2003년 선출된 의회까지 끌어들이는 건 위선”이라면서 하디 정부의 긴급 의회 소집을 강하게 비판했다. STC 대표인 알 주바이디는 지난 7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독립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선명히 밝혔다. “우리 남부는 우리의 국가를 반드시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 있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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