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연구 김영범 대구대 교수
“김원봉, 임정에 불참했다 1940년대 참여
독립 위해선 좌우 누구든지 손잡았다”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을 선도한 독립운동가, 그러나 광복 이후 월북해 역사 속에서 사라진 논란의 인물, 약산(若山) 김원봉.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2015)에서 배우 조승우가 던진 짧지만 강렬한 대사는 널리 알려졌지만, 김원봉의 생이 제대로 조명된 적은 없다. 보훈처가 최근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건국훈장 추서할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김원봉은 이념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보수 진영은 김원봉이 김일성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서훈에 반기를 들었다. 반면 학계에선 독립운동의 공적을 중심에 놓고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하다.
김원봉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논란의 핵심은 월북 이후 행적이지만, 객관적 사료가 부족한 탓에 온갖 말들이 객관적 평가를 가리는 형국이다. 한국일보는 1980년대부터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김영범(64) 대구대 교수를 인터뷰해 김원봉의 행적을 짚어 봤다. 김 교수는 김원봉의 행적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국내 수위의 권위자로 꼽힌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데 이견이 없다. 김원봉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결성해 무장 투쟁과 군사 운동을 꾸준히 실천했다. 조선의용대는 전쟁 중 중국의 최고위 통치자였던 장제스(장개석)의 재가를 받아 중국에 설립한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됐고, 김원봉도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을 맡았다. 김 교수는 “김원봉은 국외 독립운동 전선에서 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최고의 지도자였고, 무장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당시 임시정부와의 대립, 사회주의 이념 지향, 분단 이후 월북 행적 등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보수 진영에선 그가 ‘임시정부의 분열을 부추겼다’고 비판한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오해”라고 했다. 김원봉은 임정에 대해 처음에는 ‘불참과 불관(不關)’이었다가 나중에 ‘적극적 참여’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김원봉은 1920년대 임정과 선을 그었다. 이승만이 당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 통치를 청원했다고 알려져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분개하던 때였다. 단재 신채호의 주도로 ‘이승만 성토문’이 만들어졌고 김원봉도 서명했다. 1930년대엔 ‘임정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취하며 임정에 관여하지 않았고, 1940년대 들어 그래도 임정으로 힘을 모으는 게 낫다고 판단해 합류했다. 김 교수는 “김원봉은 임정이 좌우 세력 모두에 문호를 넓혀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며 “김원봉의 참여로 임정 세력이 커지고 민족대표성이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김원봉과 김구와의 관계는 계속 논란이 되는 지점이다. 둘이 껄끄러웠던 이유는 뭔가.
“김원봉이 김구를 배척했다기 보다는 김구가 김원봉을 경계했다. 두 사람은 일종의 라이벌 관계였다. 정치적 주도권과 군사 조직 등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김구 입장에선 김원봉이 임정과 거리를 두고 낮춰보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시 임정을 계속 구심으로 삼기보다는 좌우를 거국적으로 집결시켜 새로운 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의열단이 앞장섰다. 그런 분위기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이 적극 주도한 것 때문에 김구는 김원봉을 좌파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었다. 김원봉이 먼저 조선혁명간부학교와 의용대를 설립하자 김구도 뒤이어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과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1930년대에는 김원봉이 김구보다 앞서 나갔다. 양측이 오래 대립했던 만큼 감정의 골도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1939년 김구와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화해했다.”
-보수 진영에선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한다. ‘빨갱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단, 항일 운동과 민족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공산주의 세력도 품어 안고 활용하면서 같이 갈 수 있다고 봤다. 공산주의 운동에 잠시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1927년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고, 2년 뒤 중국 북경에서 사회주의 운동가 안광천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만들었다. 당시 김원봉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한 것도 사실이다. 이때가 김원봉 일생 중 가장 좌경화 됐던 시기다. 그러나 당시 레닌주의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맥락으로도 통용됐지만, 식민지에서는 독립을 위한 민족혁명 운동이 우선돼야 한다는 뜻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원봉은 후자였다고 본다. 실제 김원봉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로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뒀다. 중국 국민당과 손을 잡았고, 우파 정신으로 무장한 국민당의 비밀정보기구인 ‘삼민주의역행사’, 일명 ‘남의사’의 조직 책임자와 접촉해 서로 돕기로 결의했다. 때문에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극우 파쇼와 손잡았다’고 비난 받았다. 이 행적은 그가 북한에서 숙청 당하기 전에도 문제가 됐다. 결국 김원봉은 독립 운동을 위해서라면 좌우 세력 누구든 마다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김원봉이 추구한 이념은 무엇인가.
“김원봉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혁명론’을 주창했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이뤄 내고 근대적인 의미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게 민족혁명론의 핵심이다. 김원봉이 만든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17개조)은 국제공산주의 노선이나 계급혁명론을 따르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지향했다’는 내용도, 그런 걸 암시하는 단어도 적시되지 않았다. 강령은 정치 체제로는 민주주의를 전제했고, 국민의 기본적 자유도 포괄적으로 보장했다. 경제 정책 면에선 토지 및 기간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다. 그러나 이는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구의 한국국민당 강령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되는 대목이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의 공동성명에서 광복 이후 만들어 갈 새 나라의 모습이라고 제시한 비전이나 1941년 임정이 채택한 건국 강령도 대동소이하다.”
-김원봉이 해방 이후 월북한 것은 자발적 선택 아니었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김원봉의 월북은 ‘00를 위하여’가 아니라 ’00 때문에’였다. 1946년 10월로 추정되는 시점에 김원봉이 친일 경찰 노덕술에 잡혀 가 따귀를 맞는 등 수모를 겪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김원봉이 느낀 수치심과 모욕감, 환멸이 그 만큼 컸다는 뜻이다. 상당한 수준의 신변 위협도 받았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다음은 김원봉 차례’라는 말이 나돌았다. 김원봉은 어린 부인과 갓난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정세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은 힘을 합치기보다 이승만은 친미로 기울고 김구는 반공 우파 색채를 강화하는 등 정치인으로서 개별 행동에 나섰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도 김원봉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월북은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 정권에 협조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갔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쫓겨 간 셈이다. 이를테면 ‘강박된 북한 행과 잔류’라고 본다.”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것은 사실 아닌가.
“맞다. 부인할 수 없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랬다. 김원봉은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 격)과 헌법제정위원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초대 내각에서 국가 검열상(감사원장 격)에 이름을 올렸고, 노동상도 역임했다. 국가 검열상은 서열상으로는 높은 자리이지만, 군사, 경제 등의 권력을 주무르는 핵심 요직은 아니었다. 김원봉의 이름값을 활용하기 위해 대우해 준 것에 가깝다. 김원봉이 1952년에 받은 ‘로력훈장’도 군사 작전에 기여해서가 아니라 봄철 파종을 잘 지도했다는 명목으로 받았다. 김원봉이 환갑을 맞아 의례적으로 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 그러나 김원봉이 북한군의 남침 훈련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북한에서 군사 관련 분야 공직을 맡지 않은 김원봉이 남침 훈련에 관여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원봉이 조선노동당 당원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김일성 체제에 각을 세운 것인가.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 1958년에 작성된 마지막 관련 문서에서도 김원봉 소속은 조선인민공화당으로 돼 있다. 1935년 김원봉이 주도해 만든 민족혁명당이 1947년에 바꾼 이름이다. 북한은 노동당원이 아니면 권력 핵심이 될 수 없는 구조다. 김원봉이 노동당에 가입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조선인민공화당을 고수한 것은 북한의 정치를 전면적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김원봉은 외세의 간섭을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지켰다. 한국전쟁 무렵 납북된 독립운동가 조소앙과 안재홍, 박열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김일성 체제에 쓴 소리를 했다. 김원봉은 납북된 처지가 아니었던 데다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그 조직에 함께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원봉이 숙청된 이유를 놓고도 설이 많다.
“한국전쟁에서 패한 뒤 김일성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지만, 김원봉은 건드리지 않았다. 김원봉이 설립했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들이 1956년 김일성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숙청 바람을 맞은 ‘8월 종파 사건’이 있었다. 그 때도 김원봉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김원봉은 차츰 권력에서 멀어졌다. 1957년 실권이 없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의장(국회부의장 격)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이듬해 5월 김원봉의 제자였던 장평산의 쿠데타 모의가 적발된 것을 계기로 김원봉이 과거 중국국민당 비밀정보기구와 접촉했었다는 게 뒤늦게 문제가 됐다. 김원봉은 ‘반국가적 반혁명적 책동죄’로 체포되는 동시에 현직에서 해임됐다. 이후 투옥돼 옥중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설이 있고, 재판 없이 풀려나 평양 근처에서 낚시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김원봉이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석방된 뒤 오래 살아 남았다는 설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김원봉이 사망했다는 명확한 기록도 없다.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 서훈 논쟁은 어떻게 보나.
“김원봉은 독립과 민족 혁명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북한에서의 행적만 따로 떼 내 전체적인 평가를 대체하는 것은 일면적이거나 편협하다고 생각한다. 보수 진영에선 김원봉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실은 ‘뼛속 깊이 민족주의자’였다. 그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 ‘민족 우선’ ‘민족 중심’으로 모든 세력을 규합하려 애썼고, 그 만큼 품이 큰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당장 서훈을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서훈에 반대 여론이 있고,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보훈처의 단서 조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훈처 규정에는 군부정권 시절 반북 대결주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성숙했고 남북 화해가 모색되는 시대인 만큼, 그 규정 자체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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