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외교장관 로베르 슈망은, 프랑스와 독일의 석탄과 철강 생산 전체를 회원국 주권과 자율성을 구속하는 공동의 고위 기관 아래 둘 것을 제안했다. 2차대전의 승자 프랑스는 슈망선언을 통해 패자 서독을 관대하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 포용하려 했다. 슈망선언에는 석탄ㆍ철강 생산의 연대가 유럽연방의 첫 단계로서 경제 발전을 위한 공동의 기초이자 전쟁산업을 제약하는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서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모색하는 초국가적 기구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이 참여한, 1951년 4월 파리조약으로 탄생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다.
슈망선언은, 유럽 통합을 주도한 시민사회의 기획자 장 모네의 작품이었다(‘장 모네 회고록’). 1950년 초 모네는 유럽에서 전쟁의 공포를 읽고 있었다. 동ㆍ서독 분단 현장인 베를린을 둘러싼 미소의 대립을 보며 “힘의 법칙만”을 본 모네는, 그 법칙을 넘어서는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모네는 석탄과 철강이 “경제력의 열쇠”이고 “전쟁 무기 제조를 위한 원자재”이기에, 둘의 공동 관리가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세계 평화는 그것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처하는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가 슈망선언의 첫머리였다.
프랑스의 창조적 기획에는, 서독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을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만든 미국에 대한 설득이 포함돼야 했다. 서독은 석탄과 철강의 공동 관리가 서로의 안보 우려를 불식하는 방법이라 보았다. 석탄과 철강의 카르텔 형성이라 의심한 미국의 경제 우려에 대해서는, 슈망선언에 설계 중인 제도가 시장을 교란하는 카르텔이 아님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서독과 미국을 설득한 이후, 모네가 보기에 “국제정치에서의 근본적 전환”을 이룬 슈망선언이 발표됐다.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고 제도 없이는 아무것도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네의 “대담하고 건설적인” 실천이었다. 파시즘과 타협하지 않았던 보수세력인 슈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민주주의자들이 추동한 서유럽의 평화 과정은, 진보세력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동의와 함께 갔다. 협상을 상호 이해에 기초한 신뢰 구축으로 생각했던 모네는, “솔직함”이 신뢰의 비밀이고,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2017년 말 재개된 한반도 평화과정의 한 변곡점인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을 보며, 1950년 초반 유럽 통합 과정을 복기한다. 다른 평화 과정과 달리 양심적 중재자가 부재한 한반도 평화 과정에서 한국이 1950년 초반 프랑스처럼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대한 평화의 철학이 담긴 창조적 정의와 설계를 갖고 있는가의 여부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이 정의들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한국이 북미를 설득하려면, 역사적ㆍ이론적 정당성을 가진 기획서가 있어야 한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한미가 “완벽하게 동일한 생각”이라면, 북한에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기다린 북한은 미국의 “계산법”을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받았다. 셋째,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북한의 충고는, 한국에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부적절한 언사다. 당사자인 기획자는 행위자들의 공동 이익을 설계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미국산 무기 구입에 대한 북한의 오래된 대응은 “강력한 군력에 의해서만 평화가 보장된다는 철리”다.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실현하는 창조적 기획의 부재가 관성의 행동과 말을 만들고 있다. 한미가 합의한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슈망선언을 다시 읽어 본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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